토요일, 하늘은 점차 구름이 많아지고 있다. 아파트 단지에도 길가 작은 놀이터에도 하얗고 노란 꽃들이 피었다. 꽃이 없을 때는 무슨 나무인지도 모르고 지나치던 사람들도 고개를 들어 한 번씩 나무를 올려다본다.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춘다. 생강나무와 매화가 겹쳐 보인다. 뒤에 있는 흰색이 앞에 노랑을 받쳐준다. 배경이 배경을 돋보이게 하고 배경이 배경을 의지하는 봄날이다. 봄에는 이런 정서가 옳다. 춘흥春興이란 것, 이 계절에만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이 있다. 그를 맞이하여 세상이 모양을 낸다. 단장을 한다. 색이며 소리도 다시 갖춘다. 꿈은 헛꽃일수록 아련해지고 날은 꿈처럼 흐를 때 사랑스럽다. 나의 날을 연모한 적이 있다면 그때는 봄날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대의 봄날에 놀러 가고 싶다.
싹이 난다, 물이 흐른다, 기지개를 켠다, 새가 난다, 바람이 분다, 빨래가 마른다, 꽃이 핀다, 영화가 시작한다, 편지를 쓴다, 설렌다. 그리고 피아노. 나는 아이와 연탄곡을 치는 꿈 속에 있다.
강이는 오후 5시 성당에 갈 준비를 마칠 때까지 거실과 방을 오가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저도 신중할 때는 말이 없는 것을 알까. 나는 눈치껏 감을 잡는다. 오늘 뭔가 있구나. 강이는 MBTI가 어떻게 될까. 워낙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보니 아이들이 계속 알려줘도 머릿속에 남지 않는다. 뭐가 뭐고 뭐는 뭐라고 그러는데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요즘 흐름이 좋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이 흐르는 세상도 - 세세라기, 나는 가끔 헷갈린다. 이 말은 우리말 같지 않은가. 얕은 여울, 그 여울에 흐르는 물소리를 일본 말은 이렇게 부른다. せせらぎ. - 넓어서 사람 사는 세상에 지지 않는다. 거기에도 경쟁이 있고 오염이 있고 희생이 있다. 옅은 여울이어도 물살은 빠르고 물살이 빠르니까 거기를 지나는 물은 깨끗해지는 것처럼 그 세상에서도 주고받는 것,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놓는 이치가 통용된다. 만물이 사용하는 공통 화폐는 그거다. 나도 내줄 것이 있어야 하는데 빛도 아니고 향기도 아니고 소리도 아니고 무엇을 가졌던가. 나를 살리는 존재들에게 줄 게 없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을 챙겨서 가져갈까.
산이는 학교가 재미있다고 그런다. 초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이 생각난다. 학교 가고 싶다며 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텅 빈 운동장에 가서 시간을 보냈던 날들. 함께 어울리는 소리, 산이에게서 연상되는 말은 '같이', '함께', '여럿이서' '옹기종기' 그런 말이다. 산이는 경제를 배우는 동아리에 들었다가 지금은 건축 동아리 멤버가 됐다. 화학을 공부하는 것도 좋다고 그러던 아이가 어떤 실마리를 찾은 듯한 인상이다. 인생은 미로 같다고 이야기할까, 아니면 바다라고 그럴까. 아니면 흐르는 강물처럼?
가늘고 가는 실이라도 그것으로 영영 벗어날 길 없는 길을 헤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손에 쥐여줄까, 허리띠에 묶어줄까.
꿈이 없는 꿈을 볼 때만큼 안타까울 때가 없다. 그때 맥이 풀리는 것을 느낀다. 그 아이가 누구든 다른 것은 가르쳐 주지 못하더라도 잠시 붙잡고 이야기해야 한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들어봐야 한다. 지금은 서로 말이 없는 시대다. 휴대폰으로 남의 꿈을 동경하고 쫓고 질투하는 시대. 돈이나 왕창 벌어야겠다는 시대.
어린이 미사는 꿈꾸는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해방 일지였을지도 모른다. 마땅히 놀 데도 없고 갈 데가 없던 나 어렸을 적에 토요일 어린이 미사는 친구도 있고 오르간 소리도 있고 친절한 눈빛과 낭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게다가 하느님도 계셨으니까, 거기만큼 천국을 닮은 곳이 또 있을까. 그러니까 미사곡은 내가 들었던 연주회 같은 것 아니었을까. 오르간을 연주하던 보경이가 잊힐 일이 있겠는가. 조숙현이란 이름도 여전히 기억한다. 음악을 들려주는 일은 선한 일인 것을 어린 나이에도 나는 얼핏 알았던가 보다. 솔직히 토요일 어린이 미사가 생략되고 난 뒤에 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하나를 얻고 하나를 내놓아야 하는데..... 내가 내놓는 것보다 아이들이 내놓을 저것을 우리는 무게를 달 수 있을까. 어린이 미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늦은 오후의 햇살, 나는 그 속에서 제일 행복했었다.
강이가 중고등학생 미사에서 반주하는 것을 이전에도 몇 번이나 봤다. 그런데 어제는 왜 저렇게 조바심을 내나 싶을 정도로 들락거리면서 연습을 하더라. 다른 곡 4개를 연습해야 한다고 느지막이 말을 꺼낸다. 그랬구나, 말을 하지... 나는 그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제야 아이 편을 든다. 쉬지도 못하고 혼자 애를 태웠겠구나.
아내는 어디에서 들었는지 아침에 양배추와 당근을 전처럼 부쳐서 먹는다. 건강검진도 예약되어 있는데 아마도 신경 쓰이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지난번에는 약을 처방받기도 했으니까. 이게 좋다고 나한테도 한 젓가락 덜어주려고 그런다. 다이어트도 날마다 시작한다. 살 빼야 하는데,라는 말은 그 어투마저 고스란히 반복된다. 잠자코 밥을 먹던 산이가 던진 말이 식탁을 폭격했다. 웃음이 터졌다.
"코끼리도 채식은 해."
토요일 학생 미사가 끝나고 차에 올라탄 강이가 간식으로 받았다며 김밥을 서너 개 건넸다. 아내는 둘, 나는 하나. 어쩌면 아내가 세 개 먹었을지도 모른다. 시동을 켜고 어두워진 도로로 나서는데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그런다.
"하나도 안 틀리고 누가 그렇게 반주를 잘한데!"
또 하나의 일기가 페이지 하나에 촘촘히 적혔다. 페이지를 넘기는 재미, 그것은 어떤 재미일까. 분명 그런 것이 있는데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재미 같은 것이 사람들에게는 있다. 그런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