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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자살 사건

시 읽기

by 강물처럼


눈사람 자살 사건 /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서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지는 점에서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중학생 딸아이는 시를 한 편씩 읽다가 외운다. 시 백 편을 갖게 된다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던 3월 어느 날 아침, 아이는 오호, 그래? 그 눈빛이었다. 아직도 내가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 그 눈빛에 잠시 당황했다. 소원이라는 말보다 소원이라는 말을 진심으로 대하는 딸아이에게 어쩐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풀 내음이 났다. 살짝 창문을 열고 차 안의 공기를 흔들었다. 옅은 현기증, 두 눈을 손으로 비볐다. 오십 년을 산 내 눈동자에는 부연 탁류가 흐르는 듯하다. 점점 선명하게 읽지 못한다. 눈이 먼저 나이를 먹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맑은 것들을 맡을 때도 어지럽다. 나는 무채색이 되어 가고 너는 빨갛고 파랗고 노란 물감을 들고 앞을 주시한다. 너는 맑고 나는 아직 밝다. 아침 햇살이 비친다. 깊이 그 햇살을 들이마신다. 햇살이 무채색이 되어 가는 나를 보충한다. 너는 내가 보이냐. 회색이 그래서 편할 때가 많다.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더라도 나는 잠잠한 듯해서 좋다. 아이가 가진 물감이 낯설지 않다. 나도 저 물감으로 무엇인가를 그리고 싶었겠지. 너는 시를 다 외우고 나면 아마도 다른 소원을 갖게 될 거야.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그럴지도 몰라.

아빠는 눈사람 자살 사건 알아?

당연히 모르지. 모르는데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쉬우니까, 잠시 기다렸다. 산이와 강이 둘이서 옛날을 꺼내놓고 떠드는 날이 있다. 오래된 물건들 볕에 내놓고 목욕시키면서 입이 바쁜 날 같은 날이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 지금도 어리다. - 그러면서 시작하는 옛날은 다 예쁘다. 어렸을 때, 우리 앞에 차가 한 대 서 있는 거야. 아빠가 차에서 내리더니 그 차 뒤에서 미니까, 차가 앞으로 막 가더라고!

아빠가 차에 타더니 그랬잖아.

"사실은 내가 다른 별에서 왔는데 조금 있다가 돌아가야 해. 지금 본 것은 엄마한테 말하지 마라. 비밀로 해야 하거든."

나도 기억난다. 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우고 조용히 내 말을 듣던 날이.

정말 산이와 강이는 엄마한테도 그리고 누구한테도 내가 외계인이란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 뒤에 또 하나의 비밀을 알려줬다. 사실은 내가 그 산타 할아버지였어.

두 아이가 마음에 담고 키웠던 그 신화는 지금은 어디를 날고 있을까. 혹시 별나라로 날아간 것은 아닐까.

김소월의 산유화를 천천히 암송하는 강이에게 물었다. 너는 거기에서 어디가 마음에 들어? 특별해? 오히려 같은 말이 반복되어 외우기가 쉽지 않다는 아이에게 다른 생각을 불어넣었다. 외우려고 하지 말고 그림을 바라보는 것처럼 오래 보는 거야. 한 번에 다 보는 것이 아니라 자주 보는 거야. 보러 가는 길을 생략하지 마. 보러 가는 길에서 변화하는 거야. -나는 언제부턴가 변한다는 말 대신에 변화한다고 그런다. 그러면 더 마음이 편한다. 더 바르게 말한 것 같아서 좋다. - 도중에라는 말을 잘 챙겨야 해.

나는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여기!

아마 강이는 '혼자서'라는 말을 집었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여자아이는 그 분위기, 혼자에 집중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금방이라도 먼지처럼 흩어질 것 같은 교우관계를 매일 경험하면서 어떤 친구를 편들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래도 나는 잘 잡았다고 했다.

'저만치'라는 거리는 얼마쯤일까. 내가 한 말은 아닌데 '저만치' 때문에 산유화는 근사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랬어.

오늘 아침에는 누구의 어떤 시를 외울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눈사람 자살 사건을 찾아 적어본다. 그랬구나, 따뜻한 물에 잠긴 눈사람이었구나. 아이가 나에게 물어오면 나는 어디가 좋았다고 말할까.

'아무런 이유 없이'

나는 거기에 줄을 긋는다. 중국 작가 위화가 쓴 소설, 인생에 나온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햇살이 번지기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이다. 밥이 다 되었다고 쿠쿠가 알려준다. 나도 서둘러야겠다.

"사람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 인생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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