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수요일 아침이다. 비에 젖은 도로를 내려보다가 아이들 놀이터 한 곳에 눈길이 간다. 저기 목련이 좋구나. 작년에도 저 자리에 있었을 텐데 - 늘 그렇듯 감각은 새로 찾아낸 것들을 따라 어제와 다른 감각이 된다. 때로는 날카롭고 예민하게 달궈진 감각이 헌 옷처럼 나를 대할 때가 있다. 아이가 내내 엄마 손을 잡고 따라다니더니 어느 순간 엄마를 앞질러 가면서 뒤돌아 보는 그 모습. 어떤 감각은 그때에도 아이 같지만 어떤 감각은 벌써 투정을 한다. 답답해하며 세상에 저 혼자 나온 줄 안다. - 낯설다.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중이라 그런지 보기 좋다. 낯설어도 놀이터와 잘 어울린다, 어울릴 뿐만 아니라 놀이터에 격이 하나 갖춰진 모습이다. 사람들이 품격이라고 하는 그런 것이 여기 위에서 보고 있으니까 선명하다.
허리가 아파도 눈은 잘 떠진다. 휘청거릴 때마다 다른 종류의 한숨이 섞어 난다. 불안과 안도, 혹시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살살 - 정말 살살 - 몸을 일으키고 그보다는 빠르게 거실을 걸어서 가로지른다. 사람이 우습다는 지점이 여기다. 겨우 몇 발짝인데, 쾌감이 있다. 싸우고 서로 어색할 때 누구라도 웃어버리면 금방 화해가 되듯이 사람의 통증도 그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통증에는 진통제, 사람은 여러 종류의 진통제가 필요한 특별한 환자다. pain killer, 통증을 죽이는 킬러, 저 통증을 가리키는 말도 분야에 따라 상당히 많을 것이다. pains, 통증에 's'를 붙이면 다른 말이 된다. 나는 어쩌면 통증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pains, '수고'하며 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한 '수고'는 죽지 않도록 살살 만지기로 한다. 저 하얀 목련 꽃도 지금 수고하고 있을 것이다. 한창 그것을 뽐내고 있지 않는가.
서대전에서 논산으로 난 국도를 따라오다 보면 놓칠 수 없는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 모든 것들이 가을색으로 덮일 때 샛노랗게 찰랑거리는 그 은행나무를 멀리서부터 바라보면서 달리는 기분은 명작을 감상하는 기분이다. 처음 면허를 따고 그렇게 다녔으니까 20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진안 운장산 기슭에는 허리가 둥그렇게 살찐 오동나무가 근사하고, 고산 운암산 바위 중턱에 살고 있는 소나무는 그 자리에서 1시간을 앉아 있어도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그윽했다. 나이를 먹어가며 서러운 것은 '그때' 인상 깊었던 것들을 다시 만날 기회가 거의 없다는 자각이다. 시간도 허락되지 않고 또 세상에는 아직 보지 못한 것들도 많다. 시간이 허락되더라도 그 골짜기, 그 바위 위를 올라갈 수 없을 것이다. 설령 그 자리에 다시 찾아가더라도 내가 '내가' 아닌 것을 어쩔 수 없어서 오래 막막해할 것이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골목길, 담장, 목련, 이 세 가지가 내 감각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던 것이 분명히 그날이었다. 봄날은 하나의 신념처럼 골목길로 들어가서 세모난 집 담장 아래에 둥그렇게 피어있는 하얀 목련 꽃이 되었다. 저 집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저 나무를 보겠구나. 그것이 내가 가진 결여인 것을 알았다. 목련은 나에게 없음이며 있음이 되었다. 장애가 충동을 부른다. 통증이 평화와 손잡는 것이다. 부족하지만 이런 저라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다.
아이들도 학교에 갔다. 등굣길에 동행하지 못하지만 - 하얀 목련이 필 때면 생각나는 사람, 양희은의 노래를 들을까? - 나는 나대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밥도 먹어야 하고 이렇게 글도 써야 한다. 물론 커피도 한 잔 마셔야 한다. 머리를 감고 병원에 가야 할 텐데, 지금 걱정은 그것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