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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부르는 홀로 아리랑

그 노래

by 강물처럼


소염 진통제를 맞고 움직였다. 왼손으로 허리를 지지하고 천천히 모현동 주민센터로 걸어갔다. 투표를 끝내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모처럼 맑은 하늘에 바람마저 상쾌했다. 건물 안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더 많았다. 사람들은 많은데 말이 없었다. 웅성거림이 없었다. 투표하러 온 사람들을 관외, 관내로 안내하는 투표 관리인 외에는 아무도 떠들지 않았다. 이 침묵은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 같다고 아내에게 넌지시 속삭였다.

2024년 4월 5일, 나무 심기 좋은 날씨에 국회의원 사전 투표가 시작됐다. 아내는 웃으면서 어제 같았으면 투표하러도 못 왔겠다며 너스레를 떤다. 걸음을 걸을 만했다. 이참에 진짜 지팡이를 하나 구입할까, 아직도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아내는 딴청이다.

"나이 드신 분들은 많은데 젊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네요."

아는 얼굴이 있을까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4층 널따란 공간에 제법 모양을 갖춘 투표소가 나왔다. 투표함도 가운데 몇 개 놓여 있다. 순서가 금방 돌아왔고 투표용지를 받고 슬쩍 몇 개나 되나, 정당 이름을 훑어봤다. 그리고 도장을 두 번 꼭 눌렀다. 지역과 비례에 하나씩.

바깥바람이 사람을 개운하게 씻어주는 듯 불었다. 벚꽃 무더기가 여기저기서 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어디 가서, 점심 먹지? 물음이며 대답 같은 느낌을 풍기는 말투가 딱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차를 타고 시내를 지나 생선탕을 먹으러 갔다. 차에서 노래를 하나 틀었다. '홀로 아리랑'

"이 노래를 부르더라고, 내가 찡해서 이거 사람들에게 보내줬다니까."

저 멀리 동해 바다 외로운 섬, 익숙함보다 친절함, 나는 이 노래를 친절하다고 기억한다. 나에게 친절했던 가사와 음성, 그리고 그 시절들이 함께 창밖으로 흐른다.

그때는 다들 바쁘게 살았다. 그것은 패기였던가. 봄날에 한 번 피는 낭만 같은 것이었던가. 세상을 몰랐다면 몰랐고 순진했다면 순진했던 나이, 닻을 내리고 낯선 땅에 상륙하는 선원들의 눈빛을 나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모르니까, 그 말을 4조 반짜리 다다미 방 벽에 붙여 놓고 날마다 그다음 말을 생각했었다. 모르니까 돌아서 갈까. 모르니까 그대로 갈까. 나는 그때마다 '모르니까' 그 길을 따라 걸었던 것 같다. 막막한 것은 덤 아니었겠나. 한 번도 막막함을 탓한 적은 없었다. 차라리 길을 잃을 것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던가 싶은 그때 그날들.

거기는 어디였을까. 96년 12월, 눈이 내리지 않는 동경, 그 유명한 신주쿠 어딘가, 젊은 청춘들이 춤추면서 술 마시고 놀던 곳이었다. 1년에 한 번, 12월 첫 주에 치르는 시험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다. 가난한 유학생들이 처음으로 마음이 다 통했던 것이 신기해서 나도 합류하겠다고 흔쾌히 대답하고 아르바이트가 끝나자마자 찾아갔던 곳. 거기를 뭐라고 불렀던가.

요즘은 클럽이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그것은 클럽 같은 것이었을까. 낯선 풍경이었다. 맞아, 우리 젊었었지? 모르긴 해도 동경에 있는 유학생들은 다 모여 흥겹게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춤도 그렇고 노래도 그래서 줄곧 앉아 술이나 마시며 떠들었어도 그 홀가분함이란, 나는 젊었었다. 내 앞에는 누가 앉아 있었고 내 옆에는 누구였던가.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그날을 기억하기는 할까.

내가 여학생들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던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더 이상 투정이나 부리고 치장하느라 바쁜 사람들이 아니라 삶을 진지하게 대하는 그들의 자세에 놀라고 있었다.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감동하면서 선배나 동료, 후배들을 격려하는 생활이었다. 사람은 자기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모습이 가장 빛난다. 진심으로 타인을 응원했던 시절, 내가 그 시절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까닭이다.

시끄럽던 홀이 차분해졌다. 전철은 한참 일찍 끊어졌고 택시는 너무 비싸고 어차피 여기는 아침까지 이런 상태로 술을 팔고 음악이 흐른다. 테이블마다 각양각색의 풍경이 펼쳐진다. 누군가는 피곤에 지쳐 소파에 기대 잠들고 몇몇은 잔을 부딪히며 속삭이고..

처음으로,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는 술을 마셨던가, 아니면 무엇에 취했던 것일까. 나도 몰랐다. 어느 순간 나는 무대 중앙에 서서 혼자 조명을 받고 노래를 하나 고르고 있었다. 다들 반응이 없이 하던 대로 새벽을 즐기고 있었다.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 보자."

아마 술을 마셨던 듯하다. 노래가 편하게 나왔던 것이 생각나는 것을 보니···. 그래, 편했다. 무엇이 편했던가. 나는 절대 노래를 편하게 부를 줄 아는 사람이 아닌데 마치 사람들의 어깨를 하나씩 다 어루만지는 기분이었다. 수고하는 자, 내게로 오라, 성경 구절이 어떤 마음이었던가 만져지는 느낌이었다. 놀랍고도 흥미로운 순간이 꿈틀댔다는 것을 그대는 알 수 있을까.

나는 어디 가서 흥에 겨우면 '조선'이란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온다. 조선은 하나다! 그런 말 할 때 좋아한다. 우리라는 말하고 조선이란 말이 내 안에서는 어떤 일체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아니다.

'조선' 사람은 아리랑이란 말 하나에 흔들리고 잠이 깨고 어깨를 엮는다. 내가 그들의 잠을 깨웠던가. 아니다. 하나, 둘,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몸을 일으키고 같이 부르기 시작했다.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그 가사가 사람들을 깨웠다. 한 사람이 따라 부르는 노래가 다른 사람을 일으켰고 그 옆에, 또 그 옆에. 마지막 4절은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함께 불렀다. 목소리가 새벽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 듯했다. 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다니! 오, 하느님.

그리고 아침을 맞았다. 희미하게 밝아오는 아침해, 일본은 아사히의 나라다. 아사히, 아침해. 그 해를 품에 안으며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던 날이 내 젊은 날이었다.

사전 투표가 끝났다. 사전 투표 첫날 투표를 마쳤다. 사람들이 내 마음 같아서 고마웠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홀로 아리랑을 다시 듣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허리가 아파서 다 쓰지 못하고 하루를 더 지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일요일 아침에 밝은 해를 등지고 이어서 쓴다. 이 노래는 고마운 노래다. 우리를 함께 머물게 해 주는 노래다. 젊었던 '그'가 불렀던 그 마음을 여러 사람과 나누면 좋을 듯싶다. 그는 지금 무엇을 위해 주먹을 불끈 쥐는지, 그의 노래가 무척 듣고 싶다.

온 국민이 함께 부르는 모습을, 생각만으로도 벅찬 그 광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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