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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본 꽃들

某也視善

by 강물처럼


4월이다. 꽃 피는 사월이다.

차에서 듣는 FM 방송마저 꽃이 한창 날리는 풍경을 이야기한다.

투표가 있는 날, 미리 투표를 끝낸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하나는 자기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듯했고 나머지 하나는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 표정이었다. 허리 아플 때는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최선이라고 누구나 일러준다. 고맙지, 고마운 처방이며 염려다. 나도 줄곧 그렇게 열흘을 지나왔다. 날마다 병원에 가서 치료도 받고 있으니 나름 성실하게 지내고 있는 터다.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 딴따라 따, 딴따라라 따, 연인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기타가 등장하는 것처럼 치료를 받고 있다. 아프면 좋은 것이 커피 맛이 더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간이 천천히 간다. 그러니까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마음이 바쁘지 않다는 것이다. 한 번에 하나만, 그 하나를 공들여서 한다고 할까. 접시를 가져다 놓는 일,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는 일, 수도꼭지를 잠그는 일이라든지 샤워를 하고 나오는 일 같이 평소 같으면 절대 '일'이 아닌 동작들을 '일'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짜증스러울 수도 있지만 잘 생각해 보면 꼭 그렇게 싫거나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런 사소한 동작이 사실은 다 의미 있었던 행동이었다는 것을 내 안에 감각들이 깨닫게 되는 현장이 된다. 물론 또 금방 잊고서 남들처럼 지낼 것이다. 그러다 문득 개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랬었지, 조그맣게 움직였었지 그러면서 봄날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올해 봄날은 조그만 것들을 돌아보는 패키지여행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벚꽃이 날리고 초록 순이 돋기 시작했다. 어디 가서 꽃구경할까, 운전석에 앉은 아내는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장성에 가면 황룡강이 흐른다. 그 강을 따라 나무며 꽃들이 가득할 것 같아서 거기까지 달려갈 생각이었지만 아내에게 줄곧 운전을 시키기 미안해서 머뭇거렸다. 농담 삼아 되물었다. 운전하는 사람이 준비했어야지. 나는 항상 따라만 다녔잖냐고 어이없어한다. 그래, 어디에 갈까, 어디로 가면 좋을까. 이렇게 산이와 강이를 떼어놓고 나오니 마땅히 둘이 갈 데가 없다. 갈 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쩐지 신이 나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슬슬 이런 분위기에 젖어들 줄도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곧 아이들은 자기들 세상을 만나기 위해 떠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적적해하지 않기로, 그때가 오더라도 씩씩하기로. 오늘은 그 연습이라도 해볼까. 아장아장, 어떨까. 봄날에 아장아장 다니는 둘, 미리 경험하는 둘만의 소풍.

소풍을 나섰는데 나이가 들어가는 우리가 처음 닿은 곳은 장모님 댁이었다. 나이 든 할머니가 마당에서 허리가 구부정하니 수돗가에 앉아 계신다. 나보다 더 낮고 나보다 더 굽고 나보다 더 주름진 세상을 대하는 듯했다. 그 세상이 웃으며 반긴다. 나는 일부러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인사를 한다. 죄송하게도 머리만 까닥거렸다. 마당에 마늘이 잘 자라고 있다. 파킨슨 씨가 장모님을 찾아온 지도 여러 해가 됐다. 잠시 우리 주변에 여든 쯤 되는 어르신들이 쭉 나열되며 그때마다 먼 하늘을 한 번씩 올려다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루에 볕이 모이고 손등에 핀 잔주름처럼 우리 세 사람 사이로 분침과 초침이 칭칭 거미줄을 감았다. 짧지만 이런 시간을 존중한다. 큰 것들 챙기느라 놓치고 마는 아무것도 못 되는 그 짧은 순간을 우리 세 사람은 각자의 호주머니에 한 줌씩 넣어두기로 했다. 나중에라도 먼 훗날 셋이 만나면 우리가 서로를 아는 증표로 같이 꺼내놓으면 어떨까. 그런 날이 있었던가 싶은 날, 그런 날은 얼마나 다정한 날인가 말이다.

꽃이 거기 피었을 것이다. 장모와 사위가 되는 인연도 꽃 아니겠는가. 우리 여행도 자주 다녔었는데요····. 그때가 모두 꽃이었네요.

아버지 묘소에 들르기 전에 시골 국밥집에 들렀다. 골목을 들어서는데 잘 익은 능금 향이 스쳤다. 어? 웬 장미가 이렇게 진하냐?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머릿속으로 깊은 향이 스며들었다. 수수꽃다리, 너였구나! 라일락이 피었다. 이문세의 노래가 저절로 흥얼거려지는 꽃, 라일락 꽃향기.

거기 깍두기는 왜 이렇게 맛있는 걸까. 어제저녁에도 오늘 아침에도 우리는 서로 확인했다. 아내는 급기야 무를 사다가 자기도 깍두기를 담아 보겠다고 나선다. 생강이 기막히게 잘 섞인 맛이던데! 어쩌면 그랬지 않았을까. 자기 엄마를 보고 온 길이라서, 방금 골목에서 꽃향기로 향긋해진 후라서, 그리고 배가 고팠던 참이라서 더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내일 다시 오더라도 깍두기는 여전히 맛있겠지만 오늘 이 맛은 이제 더 있을 수 없는 맛 아닐까.

아버지는 깔끔하게 지내신다. 잔디도 금방 키가 자랄 것이다. 저 비석에 강이 이름을 써넣어 줘야겠다는 생각을 매번 하면서 여기를 떠나면 늘 잊고 산다. 삶과 죽음은 그런 식으로 서로를 방기하고 책임지며 또 잊으면서 생각나는 사이다.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사람들, 살면서 잊어가는 사람들, 그 사이 어디쯤을 우리는 걸어가고 있다. 거기에서도 해가 뜨고 해가 지며 바람이 부는 계절, 꽃이 피었다가 지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을 것이라고 비석을 쓰다듬으며 전했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를 그리워했다고도 전했다. 아내는 본 적 없는 시아버지여서 그런지 벌써 저만큼 앞서가고 있었다.

묘지 앞산을 바라보면서 여기서 그리는 수채화는 포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타고 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사람들이 '신을 너무 의인화시켜서' 문제라고 떠들었는데 나는 죽음도 실컷 살아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사람은 시간이 너무 없고 신은 시간이 아예 없다고 내가 말한 것이 묘하게 그곳에서 잘 보였다. 이제 봄이 갈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산새가 운다. 내 시간은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저 울음소리의 어디를 전달할 수 있을까. 아버지 묘소 앞에 플라스틱 꽃은 봄날에 더 짙은 향을 내었으면 싶다. 거기에도 벌이 날아들었으면 싶다.

작은 아버지는 예수병원에 계셨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일상이다. 더 쇠약해지신 것을 발목을 보며 알았다. 가느라란 발목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말을 할지 여전히 병원에 오면 잘 찾지 못한다. 하마터면 작은 아버지, 살면서 가장 좋았던 일은 뭐였냐고, 그리고 후회되는 것은 뭐였냐고 물을 뻔했다. 나는 그 말을 담아두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서서 아내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작은 아버지와 주고받는 것을 보면서 차라리 그게 편하다고 여겼다. 한 번씩 뵐 때마다 몸에 장치가 하나씩 늘어가고 있다. 자기 몸을 바라보는 저 노구의 심정을 나는 헤아릴 길이 없다. 살아온 '자기'가 살아있는 '자기'에게 전하는 말은 어떻게 시작할까. 무슨 말로 그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그만 어지럽다며 자리에 누우시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구름다리를 건너서 차가 있는 데로 돌아왔다.

장모님을 보면서도 그랬고 아버지 비석을 만지면서도, 작은 아버지 말씀을 듣다가도 꽃이 보였다. 기도였던가. 바람이었던가. 봄날이 그리는 그림 같았다. 봄날은 나를 그리고 있구나. 나는 그 그림 속에 어떤 것일까. 풀이나 나무, 구름, 아니면 향기 같은 것도 그려질까. 어쩌면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작은 아버지 드리려고 사 갔던 죽은 내놓지도 못했다. 음식을 입으로 삼킬 수가 없는 상태라 그대로 가져왔다. 그 죽을 먹으면서 개표 방송을 봤다. 거기 또 하나의 꽃이 피었다. 민주주의 꽃이 피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 우리는 좋은 나라로 갈 수 있을까. 어제 하루는 꽃을 봤다. 허리도 꽃이 약인 듯싶다. 편안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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