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 싫다'는 사투리다. 보기 싫다는 뜻이다. 그런데 보기 싫다는 말은 정말로 보기 싫다로 들려서 어째서라든지 왜냐고 이유를 묻거나 당연히 그 까닭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진다. 말하는 사람도 대개는 심각하다. 곧 어떤 결정이 내려질 것만 같은 분위기다. 그래서 보기 싫다는 말은 함부로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 말이 나올 때까지 얼마나 참았을까 싶어 듣는 사람도 침묵하게 만든다. 그에 비해서 비기 싫다는,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아직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는 투로 들린다. 어떤 때는 애정이 묻어난다. 그래서 그다음 말이 중요하다. 기다려진다. 아니, 기다려야 한다. 특히 비기 싫어 '죽겄어' 그러면서 누군가 투덜거리고 있다면 그 마음에 당신이 배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떠다니지만 말고 여기도 좀 봐달라는 하소연같이 들리는 것은 나 혼자뿐인가.
가끔 그 말이 귀에 들린다. 아내는 비기 싫은 사람들이 종종 생긴다. 그 말의 가장 큰 수혜자는 아들, 산이다. 한 번씩 그 말이 터져 나오면, 옳거니 사이가 좀 벌어지려나 보다고 내심 기대를 한다. 하던 대로 등을 보이며 내 하던 일에 더욱 집중한다. 보통 아침 7시 30분에서 35분 30초 사이에 그러고 요일로 보면 목요일이 가장 빈도가 높은 듯하다. 한 번 깨우고, 두 번 깨웠다가 그래도 안 일어나거나 못 일어나면 슬슬 발동이 걸리는 듯하다. 그러니까 '비기 싫다'는 말은 순전히 자발적인 감정은 아니다. 물론 보기 싫다는 감정도 보기 싫은 것이 점점 쌓여서 마침내 완성하는 거대한 탑이지만 비기 싫다는 깨알 같다고나 할까. 풀뿌리 민주주의 같은 가느다란 초원 지대를 연상시킨다. 초록빛의 연한 감정, 아직 무르익지 않아서 선뜻 내놓을 수도 없고 그것이 탑이 될 리는 더욱 없는 허술한 구석이 많은 감정이다. 병이 깊으면 병세도 쇠고 감기도 쇠고 산에 나는 나물도 뜯지 않으면 쇠어서 먹지 못한다. 비기 싫다는 말은 나에게 그렇게 들린다. 감정이 채 모양을 갖추지 못해서 -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망설이는 것처럼 - 그러니까 쇨 걱정이 없어서 가만 놔두면 스르르 풀어질 것만 같은 미움이다. 응어리가 지지 않는 말, 허공에 흩어지는 것들은 분수처럼 푸른 종소리가 나더라고 하지 않던가. 지각을 하든 말든 내버려 둬야지 그랬으면 가만둬야지, 그러고서 다시 방문을 열어 보는 저 여인은 어느 시대의 유물인가. 나도 시인의 흉내를 내보고 싶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지런히 상상한다. 종군기자처럼 아무도 모르게 기사를 작성한다. 곧 터질 것이다. 아, 짐작 기사는 안 된다. 사실만 사실만 기록해야 하는데····.
저녁이 되면 새들도 보금자리를 찾아 깃들고 사람도 감정도 제 집을 찾아든다. 살면 살수록 오묘한 것이 감정이란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영원히 나보다 더 나로 살아갈 것만 같은 저 떳떳함이며 부담이라니, 그것은 어떤 힘의 작용일까. AI 시대가 오고 있다고 그러지만 저 감정은 - 김정은 아니다. - 도대체 감당이 될까.
아침에는 비기 싫다가도 저녁이면 애틋해진다고 그런다. 하루 종일 어떻게 지냈는지 학교 다니랴, 늦게까지 학원에 수행평가에 시험공부에, 게다가 기침까지 콜록거리던 것까지 또 싹 끄집어내어 만지작거린다. 비기 싫다면서····.
그러니까 누군가, 특히 여자들, 그중에서도 엄마들이 비기 싫다고 그러면 상황 판단을 잘해야 한다. 그래, 그놈이 나쁜 놈이라고 편들다가 독박* 쓸 수가 있다.
내가 장모님한테 감탄할 때가 있다. 장모님은 딸 넷에 아들은 겨우 하나를 뒀다. 가만 보면 딸들에게는 공평 지고 객관적이며 합리적이게 가르치신다. 3인칭 시점을 유지하면서 거리를 좁히지도 더 멀어지는 일도 없다. 그런데 아들에게는 딴 사람 마냥 구신다. 총기도 지혜도 합리도 다 소용없다. 장모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혼내는 말은 대게 이렇다.
"가가 지 아버지를 닮아서 그래."
그 한마디로 상황을 종료시킨다. 마법의 가루는 그때 한 번 뿌리신다.
돌아가신 장인어른은 엉뚱하게 불똥이 내게 튄다고 하늘에서 푸념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튼 아들과 엄마 사이는 좀 비기 싫어하는 사이다. 그래, 둘 사이는 사이다다. 톡 쏘는 맛이 시원하고 달짝지근한 그거다. 그래서 나도 어지간하면 그 사이에 끼어들지 않는다. 비기 싫다고 그래도 믿지 않는다. 그래 봤자, 하루도 못 가는 것을 믿기에는 내 삶이 너무나 소중하다. 저 둘은 작전 세력인지도 모른다. 조심하자.
* 독박 - 고스톱 전문 용어, 먼저 점수를 얻어 go를 부른 사람이 이후 다른 사람의 득점으로 인해 혼자서 나머지 사람의 몫까지 물도록 하는 법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