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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某也視善

by 강물처럼


우회전이 문제다. 횡단보도 사고를 줄이기 위해 모든 차량이 그 앞에서 일시 정지를 한다. 보행자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법이다. 그러나 운전자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좋은 방법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뒤에 꼬리를 무는 차들이 의외로 많다. 도로가 순식간에 혼잡해지고 이러다가 사고 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울 때가 있다. 특히 출퇴근 시간이나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그 위험성이 더 커지는 듯하다. 이대로 좋을까? 자꾸 묻게 된다.

거기가 섬인 줄 알까. 거기를 섬이라고 부른다. 어떤 교차로 - 특히 넓은 도로에 있는 -에는 우회전 차량의 원활한 통행과 보행자의 안전한 횡단을 보호하기 위해 따로 공간을 둔다. 영어로는 Traffic island라고 부르고 우리말로는 '교통섬'이라고 한다. 가끔 걷거나 자전거를 탈 때 그 섬에 갈 때가 있다. 거기서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을 보면서 신호등이 바뀌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 잠깐 동안이 좋다. 섬은 늘 정답이니까. 섬 같은 존재가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4월에 꽃이 피더니 선물이 하나, 둘 도착했다. 꽃이 핀 것만 해도 좋은데 선물까지 착착 받으니까 내가 다 봄 같았다. 책이 두 권, 계란 한 판, 그리고 지팡이. 내가 받은 선물은 그렇고 아내가 받은 선물은 두릅, 동치미, 망고, 그리고 떡이다. 식품 영양 학자는 무엇을 먹는지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그러고 언어치료사는 그 사람이 하는 말과 쓰는 글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고 그런다. 범죄 수사에 쓰이는 프로파일링도 그와 비슷한 개념에 속할 것이다. 선물은 그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 그리고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지 알려주는 실마리가 된다. 내가 받는 선물들은 가볍고 단순한 편이다. 먹을 것도 별로 없다. 그런데 맛이 있다. 오래 남는 그 맛이 있어서 '주억거리게' 한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그 사람, 그 순간, 그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별 헤는 밤처럼,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이 긴 시를 외우려고 오래 서성거리고 있다. 그래, 내가 외운 것은 마음으로 배운 것들뿐이다. 예순 살이 되면 아버지 묘소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옥정호에 들러 그때 한 번 다 외워보리라.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읊어보리라. - 사는 일은 이처럼 속으로 외우는 이름들이 많아지는 것이라고 내 선물 같았던 인연들, 인연 같았던 선물들을 긴 여백으로 읽는다. 읽는다는 말은 내가 건네는 답례품이다. 잘 읽겠습니다. 그 말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조약돌 하나 올려서 인연이 벗어놓은 신발 옆에 가지런히 놓아둔다. 어제는 그런 무늬가 내게 새겨졌다. 나는 지팡이를 하나 선물 받았다.

내가 쓰던 것인데 남으니까, 지팡이를 건네받으면서 웃음이 났다. 큰 웃음소리가 나를 멋쩍게 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아직도 '오버'를 하는구나. 누가 이런 지팡이를 준다고 좋아하겠냐며, 좋아해서 다행이다며 웃으신다. 이거 절대 잊히지 않을 선물이겠는데요. 정말 대박이에요, 수녀님!

미리 말해둬야겠다. 허리가 불편하지만 걷는 데 지장은 없다. 여전히 건강하고 여전히 마음은 바쁘다. 꽃이 다 질까 봐 초조할 지경이다. 고사리가 눈에 선해서 엉덩이가 근질거린다. 괜스레 걱정을 끼친 듯해서 조금 민망했다. 아픈 거야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고 그다음 내가 처리할 수 있는 것들과 그 범위를 살피면서 가능한 더 나빠지지 않게 지내고 있다며 제법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그런데 나는 저 지팡이를 데리고 다닐 것 같다. 어디든 함께 다닐 것 같은 인상이다. 생긴 것보다 강렬한 첫인상이다. 흔히 말하는 끌림 같은 것이겠지.

계란 한 판을 풀어놓더니 아내가 흡족해하며 나를 부른다. 어머, 이거 이렇게 포장을 했네, 이 계란 좀 봐요. 이거 귀한 계란인데, 이거····. 사람이 말을 못 하고 자꾸 '이거, 이, 이거, 이거' 그러고 있다. 강화군 양사면 덕화로 주소가 써진 선물이 집안을 또 환하게 밝혔다.

지난 4월 7일에 보낸 메시지 - 저녁 식사하실 시간일 듯싶어 메시지를 남깁니다. 형님은 좋으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 일종의 부러움 같은 것인데, 선한 부러움이었습니다. 저도 정기 후원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아마 모를 것이다. 얼마 전에 광구형이 쓴 책이 나왔다. '흑염소 없는 거, 보러 가요.' 그 책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다. 늘 존경하는 마음이었지만 그동안 마음뿐이었던 것을 반성하며 이번 기회에 나도 끼어달라고 부탁했다. 좋은 사람에게 좋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날짜는 잊었지만 그 사이에 반가운 전화도 한 통 있었다. 간호사 선생님! 벌써 몇 년 전이냐며 그간의 안부를 묻고 반가워했다. 잊지 않고 그 말을 꺼냈다. 언젠가 만나게 되면 꼭 그 말을 전해야겠다고 항상 되새김질했던 거 같다. 선생님, 그때 저한테 선물해 주셨던 묵주 있잖아요, 그 묵주 제가 잘 가지고 다니다가 어떤 분 드렸네요. 병이 깊어 결국 돌아가셨는데 제가 마침 그 묵주가 주머니에 있어서 그것을 손에 채워드렸거든요. 좋아하셨어요.

잘했다며 그보다 좋은 데 쓰일 수가 없었겠다며 오히려 나를 띄워주신다. 그러면서 건강하라고 계속 건강하라고 당부하신다. 나는 이 좋은 말들을 그냥 듣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생각날 적마다, 내게 선물을 주시는 분들은 그 말을 앞에 놓고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그러신다. 그래서 나는 아무래도 잘 지내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차들이 쌩쌩 달려도 거기 조그만 땅, 교통섬에 있으면 평화롭다. 정말 바다에 떠있는 섬 같다. 섬 같은 선물들, 섬 같은 바람과 기도들이 여기저기에 떠있다.

목련이 진 자리를 또 찍었다. 수녀님은 그 놀이터가 보고 싶었던가 보다. 헤어지기 전에 놀이터가 어디냐며 물으셨다. 꽃이 핀 자리와 꽃 진 자리를 나란히 놓고 보여드려야겠다. 참, 어제 그러고 보니 또 책이 한 권 왔구나.

목련이 한창이던 4월 4일에 받았던 '고층 입원실의 갱스터 할머니'는 나도 재미있었지만 우리 집 강이가 더 반겼다. 저희들 세계에서 유명한 유튜버라고, 허락도 받지 않고 책을 챙겨서 제 방에 들어가 버렸다. 시험 끝나면 보겠다며 꼭꼭 챙겨뒀단다. 그래, 어제도 수필집이 한 권 우체함에 꽂혀 있었다. '그 길 아래 바다' 수필집 제목이 시적이다. 나도 늦가을쯤에는 우리 사는 이야기를 엮을 수 있을까. 걸어 다녔던 이야기는 꼭 들려주고 싶은데····.

그때쯤에는 허리도 아프지 않고 나도 선물을 차에 싣고 다니면서 오랜만에 인사나 좀 다녀야겠다. 자랑도 하면서, 이거 내가 쓴 책인데요, 그러면서 ㅋㅋ 해야겠다. 아니면 ㅎㅎ 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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