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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pr 30. 2024

사월은 어떤 달

오래 쓰는 육아일기


4월 30일 아침이다. 옅은 안개가 낀 것인지 내 눈이 흐린 것인지 창밖 풍경이 맑지 않다. 어제는 비가 내렸는데 아직 더 내릴 비가 남았는지 하늘도 여전히 회색이다. 조금 있으면 아이들이 잠에서 깬다. 아니, 깨워야 한다.

내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 주방 후드가 돌아가는 소리가 있다. 입속을 헹구고 천천히 손을 씻으면서 바라본 화장실 정면 유리가 유난히 깨끗한 날에 느끼는 안도감 같은 것이 그 소리에도 있다. 후드가 돌아가고 있으면 그 아래에서 국이 끓고 있거나 요리가 한창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국, 어떤 요리냐 따지는 것은 아이들의 몫이고 나는 내 등 뒤로 들리는 소리와 냄새로 오늘 하루의 평안을 점치는 점술사가 되기도 한다. 나도 사람의 얼굴에는 이미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말을 믿는 나이가 됐다. 그 사람의 평화가 저 표정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 강물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아름답고 추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흐름 같은 것 말이다. 구름이 흐르는 거라든지 물, 시간이 지나는 흔적 말이다. 아름답다는 말이 '나', 자기답다는 말이라고 그랬을 때 우리는 모두 무릎을 치며 놀라지 않았던가. 술에 잔뜩 취한 도깨비는 추하다. 추하다는 말은 옛날부터 이렇게 썼다. 醜!

 사람이 사람인 것을 놓아버릴 때 한껏 추해지고 자기답게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답다. 요즘 세상에는 술이 많다. 술이 너무 많으니까 술을 갖고서 논다. 폭탄도 만들고 약도 타고 더, 더, 더 요란하게 야단법석을 떤다. 그래야 술맛이 난다고 그런다. 늘 술을 곁에 두고 사는 신선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다. 요지경 같은 곳이 되어가고 있다. 술을 사랑하는 애주가들, 술을 자랑하는 대주가들에게서는 어떤 향기가 나는가.

 나는 술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술이 좋다. 그러나 술을 믿지는 않는다. 늘 그다음을 요구하며 빚쟁이처럼 쫓아오는 것들을 경계한다. 처음에는 얌전히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을 받아먹다가 나중에는 입을 크게 벌리고 주인을 잡아먹는 기생충들, 그 중독이라는 것들을 두려워한다.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4월이 환하게 시작하더니 4월이 저물어 간다. 4월 30일, 흐린 날 아침에 네 번째 달을 배웅한다.

 강이는 어제부터, 산이는 내일부터 시험이다. 4월 한 달은 너희도 바쁘게 지냈다. 등꽃이 피고 이팝나무에 하얗게 밥이 올랐던데 곧 아카시아 향기가 너희를 간지럽힐 것이다. 같이 걷지 못했던 것이 무엇보다도 아쉽다. 아빠가 오랜만에 허리가 아픈 탓도 있었지만 시험 때문에 그렇지 않더라도 발이 묶였을 것을 안다. 꽃 같은 시절은 그런 시절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바쁜 시절, 해야 할 것도 많아서 아쉬운 시절. 그렇게 보면 4월이야말로 꽃 같았다.

 모든 계절을 좋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거기에서도 후드 소리가 들린다는 것. 어떤 계절이든 스스로에게 친절하다는 것을 배운다. 폭풍이 몰아치는 밤에도 친절할 것은 끝내 친절하다. 씨앗을 품고 비 갠 날을 위해 묵묵히 견디는 친절이 있다. 뙤약볕 아래에서도 부지런히 먹을 것을 옮겨가는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을 응원하는 계절이 있다. 서로에게 친절할 것, 4월은 많이 그랬던 달이다. 아빠는 병원에 다녔고 엄마는 너희를 등교시켰고 산이는 강이에게, 강이는 오빠에게 친절했다. 4월은 밤에 벚꽃 봤던 달, 어떠냐? 4월은 후드 소리가 잘 들리는 달, 4월은 처음보다 조금 더 친절했던 달, 어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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