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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May 03. 2024

5월이 문을 열었다

오래 쓰는 육아일기


5월 1일이 지났는데 아빠가 용돈을 보내 주지 않았다며 엄마한테 일렀다. 강이가 시험도 잘 봤는데 왜 아직 용돈을 안 줬냐며 청소기를 돌리던 아내가 건드렸다. 아, 맞다. 산이가 힘들어하는 것만 보였던 것이다. 더 중요하니까, 더 어려우니까, 거기에만 정신이 팔렸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오빠한테 중학생 동생이 가려진 것이다. 벌써 몇 번째인가. 강이 용돈만 잊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소한 것부터 헤아려보면 부지기수로 많을 것이다. 산이가 하는 경험은 우리도 처음이라 그만큼 신중하면서 강이가 하는 것들은 한 번 해봤다는 이유로 얼마나 대충이었던가. 오빠는 말 없어도 척척 보내주면서 자기는 날짜가 지나도 말이 없다고 엄마한테 하소연이라도 했을 것이다. 강이는 그때마다 서운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건 낭패다. 정말 그런 적이 많았으니까. 알고도 그랬고 모르고도 그랬으니까.

오빠는 1주일에 6만 원을 받아쓴다. 대부분 밥값이다. 학교 마치고 학원 가는 길에, 혹은 학원 마치고 스터디 카페에 가기 전에 저녁밥을 사 먹는 산이다. 주로 어디에서 사 먹을까 가끔 궁금해진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학교 근처에 분식집으로 우르르 몰려가곤 했다. 저녁 시간이면 분식집 앞 유리창이 서리로 가득 차던 겨울, 뜨거운 보리차가 한 잔씩 앞에 놓이던 그 계절이 유난히 떠오른다. 라면은 언제 먹어도 맛있지만 찬바람이 불고 귀가 시릴 때, 10분 걸어왔다가 10분 기다려서 먹는 그 맛이 제일이었던 거 같다. 찬밥을 국물에 말아먹는 그 거룩한 예식이라니, 그때 친구들은 모두 나처럼 나이를 먹었을까. 수덕이가 새로 알아낸 라면집 할머니는 더 얼큰하게 더 푸짐하게 라면을 끓여줬다. '짬뽕' 같아! 그 할머니는 그때도 할머니였는데 지금은 100살쯤 되셨을까.

강이는 보름에 3만 3천 원씩, 2학년이 되면서 3천 원 올랐다. 오빠는 왜 많이 주냐고 따질 것도 같은데 아직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저 어린 입에서 '물가'가 비싸서라는 말이 나올 때가 간혹 있는데 그때마다 웃음이 나면서 걱정도 된다. 더 늦기 전에 서둘러 4만 원을 강이 계좌로 보냈다. 내일 소풍 잘 다녀오라는 말을 일'부'러' 함께 보낸다. 감성을 비타민 먹듯이 보충하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약하다는 것, 신경질적이다는 것, 반응이 예측 가능하지 않다는 것, 별로 즐거울 것이 없다는 것, 등등.

요즘 아이들처럼 산이, 강이도 자기 카드를 갖고 다닌다. 둘 모두 자기 용돈을 잘 관리하는 듯하다. 어른들한테 받는 용돈이나 명절에 받는 것도 모두 자기들이 관리한다. 처음에는 그래도 될까, 반신반의하면서 통장을 만들어 놓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모든 일에는 좋고 나쁜 것이 함께 온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하니까. 가능한 좋은 쪽으로 삶이 흘러가기를 바라면서 지내고 있다. 다행히 규모 있게 돈을 쓰고 있다. 필요한 것을 사고 때로는 급하게 사야 할 교재도 사놓고 나중에 엄마나 아빠한테 청구한다. 친구들 생일도 그런 식으로 챙기면서 지내고 있다. 산이는 이번에도 시험 끝나면 친구들하고 놀러 갈 계획이다. 따로 돈을 달라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지금 사정이 넉넉하다는 뜻일 것이다. 매주 월요일 아침, 등교하는 산이에게 용돈을 보내면서 내가 느끼는 일상의 고마움은 생각보다 진하다. 작은 것에서 발견하는 단단함이 있다. 내가 쌓고 있는 것은 벽돌 하나하나인데 그것이 집이 되고 울타리가 되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눈물이 많아진다는 이야기, 남자들이 많이 한다. 혼자서 심심하다 싶으면 휴대폰으로 지나간 영화나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보는데 며칠 전에도 울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오십도 넘은 남자가 청승맞게 끅끅 울었다. 10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고시원에서 여고생이 지내고 그 여고생 엄마, 아빠는 부도가 난 공장에서 지내는 것을 보고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지금은 잘 살고 있을 거라며 끝까지 소녀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학교 급식비를 내지 못해서 계란 3개를 요리해서 도시락 두 개를 싸주던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내내 시큰거렸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교실에서 도시락을 먹는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빛이 되어라. 그 어려운 시절을 버리지 말고 네 안에서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어라.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이되어라.

5월이 문을 열었다. 계절의 여왕, 그래 눈물의 여왕이 인기 있었던 것처럼 5월도 멋지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거리마다 이팝나무가 하얗게 밥을 지어놓고 사람을 대접한다. 장미가 등장한다. 붉은 카펫을 걸어오는 저 당당한 걸음을 매혹적이라고 부른다. 나도 좀 걷고 싶다. 5월에는 어디를 가든 향기롭기를 그리고 의미있는 날들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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