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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May 05. 2024

마당 같은 날

某也視善


날이 좋았다. 하늘이 맑으면 날이 좋다고 그러고 좋은 일이 생기면 또 날이 좋았다고 그런다. 어제는 하늘도 맑았고 좋은 일도 있었다.

미륵산에 갈 때 곧장 금마까지 직진해서 좌회전하는 경우가 있고 영등동에서 하나로를 따라 삼기 방향으로 달리다가 우회전해서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나는 주로 하나로를 달린다. 그 길로 달리다가 미륵산이 보이는 데서 우측으로 빠지는 길이 하나 있는데 거기를 지날 때마다 궁금했었다. 어디가 나올까?

거기가 익산 축구 공원이라는 사실을 어제 비로소 알았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해 준 대로 따라갔더니 거기 경기장이 있었고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고등부 축구 리그가 펼쳐지고 있었다. 하늘이 맑았고 경기장은 어린 선수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이렇게 필드에서 경기를 직접 관람한 것이 얼마 만인가.

파이팅을 외쳐가며 서로를 독려하는 저 기세 좋은 외침이 듣기 좋았다. 싱그러운 풀 내음 같았다. 그래서 젊음은 좋은 거구나, 아침까지만 해도 게으름 피우며 어기적거리던 내 안의 세포들이 덩달아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1시간 반 가까이 흥미롭게 경기를 지켜봤다. 한때 공을 차 봤다고 오늘을 떠올릴 스물두 명의 어린 선수들을 골고루 지켜봤다. 다치지 말고 잘 뛰었으면 싶었다.

날이 좋은 날, 오후 3시 10분. 나는 앞으로 그 시간을 좋은 시간이라고 기억할 듯하다. 삼례역을 지나 삼례 문화촌 팻말이 보였다. 삼례 성당으로 들어섰다. 한가로운 성당 마당이 나이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을 나는 안다. 늘 즐겁기만 했던 초등학교 주일학교 시절에 성당 마당은 복잡했다. 한쪽에서 여자애들이 -그러고 보면 늘 여자애들은 양보했었다. - 놀고 있었고 마당 한가운데는 남자애들이 주먹 야구를 하면서 마당을 차지하곤 했다. 누가 너의 '벨에포크*'를 묻는다면 내 아름다운 시절은 그때였다고 말해주고 싶다. 주먹으로 친 공이 성당 2층으로 날아가면 홈런이 되는 장면과 함께 성모상이 모셔져 있는 화단에는 꽃들이 늘 향긋했었다. 성당 마당을 채우던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문득 그리워지는 나이가 됐다. 아이들에게 놀이터가 되어 주는 공간은 어린 마음에도 포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데 사는 수녀님들은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1루에 쌓아놓은 돌무더기, 2루 기둥, 3루 화단석을 찍고 홈으로 들어오는 다이아몬드*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보석이었다.

아마 그래서····, 그럴 것이다. 마당이 있는 성당을 만나면 평화로워진다. 그리고 마당이 없으면 그만큼 아쉬운 생각이 든다. 내가 성당을 바라보는 기준은 어쩌면 마당인 줄도 모르겠다. 진짜 신자는 성당 안을 들여다볼 텐데 나는 마당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 스무 살이 되면서 광장이란 말에 얼마나 끌렸던가. 근사했고 혁명적으로 들리는 그 말의 씨앗은 마당이었다는 것을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야 알아차렸다. 광장으로 나가라는 말은 의지의 힘줄처럼 들렸다. 심장의 고동같이 사람을 들뜨게 하는 말들이 광장에는 있을 것 같았다. 광장으로 떠나고 싶어 했고 떠나야 하는 줄 알았다. 그것이 역사라고 믿었다. 함성은 광장에서!

어제 삼례 성당에서 수녀님을 뵈었다. 일부러 지팡이도 챙겨서 가져갔다. 돌려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잘 쓰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허리 아픈 것은 많이 좋아져서 굳이 지팡이가 없어도 상관없었지만 그러고 싶었다. 아픈 척이 아니라 아픈 것을 잊지 않는다는 사인이다. 아내는 수녀님들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말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그런다. 다른 말, 어제 2시간 동안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들은 과연 다른 말이었던가. 마침 헌책방이 같이 있는 곳이어서 나는 구상 시인의 에세이, 침언부어沈言浮語를 샀다. 60년대에 초판이 나왔던 그 책이 어쩌면 이렇게 우연처럼 어울릴까. 나도 수녀님도 아내도 다른 말로 다른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긋하게 시간을 바라봤다. 마치 마당에 나와서 바람을 쐬는 사람들 같았다. 해 질 녘에 모여 하루 어떻게 지냈냐며 서로의 안부를 천천히 물어보는 그런 사람들처럼 여유로웠다. 쫓기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들 같아서 잠시 마음이 우쭐거렸다. 한가로운 것들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성당 앞에 주임 신부님이 가져다 놓고 키우신다는 꽃들이 그래서 더 꽃이었다고 끄덕이기도 했다.

수녀님에게 드릴 3천 원짜리 시집을 하나 골랐다. 많지 않은 시집 가운데 짧은 시간 고른 거라서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벌써 절반쯤 목적지에 온 거 같은 기분으로 건넸다. 내일은 대전 성모 병원에 입원하시고 그리고 수술을 받으신다는데 그때 시집을 읽어보시겠다니까, 그때 잠시라도 오늘이 떠올랐으면 싶었다.

참, 현기영의 순이 삼촌을 주문해야겠다. 어제 수녀님이 그 책을 찾으셨는데 헌책방에는 없었다. 퇴원 선물로 준비해 뒀다가 그때도 커피를 마시면서 한가롭게 오후를 거닐었으면 좋겠다. 서서히 아카시아 향기가 나그네처럼 우리 곁을 스치는 계절이다. 물론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밤꽃 향기 이야기도 슬슬 꺼내는 줄도 안다. 모두 나그네인 것을, 나이가 든다는 것은 바쁘고 나빴던 것들을 채로 걸러 곱고 간 것을 모아 거기에 물을 붓고 죽을 끓여보는 일 아닐까. 젊어서 밥을 두 공기씩 먹고 일하느라 수고한 뱃속도 챙겨보는 것이 나이 들어감의 미학 아닐까. 죽을 잘 끓이는 일, 서로 건강하자고 건네는 인사가 되고 실천이 되는 일이다. 마당에서 맛깔나는 죽을 한 사발 받아 들고 느티나무의 세월을 상상해 보는 날을 상상했다. 그런 상상이 가능한 공간과 시간을, 그리고 인연을 고맙게 여긴다. 어제는 그러고 돌아왔다. 이제 내가 할 기도는 '모든 이에게 평화' 그것이다.

마당에는 한 시절을 지나온 기억들이 모여 있다. 마당에는 더 이상 자랑거리가 없어도 자랑 그 자체로 된 미소와 시선, 숨결이 있다. 어제는 마당에서 보낸 마당 같은 하루였다.


*벨 에포크 - 프랑스어: Belle Epoque, 아름다운, 좋은 시절이란 뜻,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까지 프랑스가 사회, 경제, 기술, 정치적 발전으로 번성했던 시대를 일컫는 데 회고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다이아몬드 - 야구는 내야의 각 꼭짓점에 놓여 있는 Base를 모두 밟은 뒤 마지막으로 홈을 밟아서 득점하는 경기다. 그 네 개의 Base를 연결하면 다이아몬드 형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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