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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May 09. 2024

여름을 향한 터널, 이별의 출구

일본 영화


여름을 향한 터널, 이별의 출구 - 타구치 토모히사


비가 내리는 어린이날이었다. 작년에도 비가 왔었다. 그랬던가? VS 그랬었다!

승부를 가르는 순간은 늘 결정적 장면이라고 소개되지만 사실은 미묘하게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 시작부터 그랬다는 말을 꺼내면 승부를 가늠하고 이해하기 쉬워진다. 세상은 평평하지 않고 비스듬히 비탈져 있다. 땅은 어긋나 있고 천체도 기울어져 있다. 사람이 그 비탈에 서서 살아가는 일이 삶이다. 공평하지 않다고 소리치는 그대의 외침은 어디에 있는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그대는 평평하고 싶은지, 그럴 수 있는지?

그 사소한 것을 꺼내놓다니, 어른들은 작년에도 비가 왔었냐며 묻고 아이들은 그래요, 맞아요! 또 한 번 감탄 부호를 붙여 말한다. 작년 어린이날에도 비가 왔다. 그날 우리는 비를 구경하고 다녔다. 산청까지 가서 우리가 걸었던 둘레길을 거꾸로 복기하면서 돌아다녔다.

아름다우나 요염하지 않고 깨끗하나 쌀쌀하지 않은 국화 향기 같은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품고 있는 기울어진 사연들을 모은다. 연주를 하면서, 커피를 만들면서, 치자물을 들이면서, 문장을 쓰면서, 밥을 짓고 아이를 키우면서, 길을 가면서····.

그렇더라도 처음부터 그랬다는 그 말을 끝끝내 꺼내지 않는 것은 인간적이어서, 인간적이란 말이 서러운 줄 아는 까닭이다. 인간적인 것들이 손에 잡히고 눈에 머물면 인간은 멈추고 만다. 그것이 인간이 경험하는 평평함이다. 처음을 지나서야 비로소 마주칠 수 있는 공평함이 거기에 있다. 수평선처럼 지평선처럼 망망한 세상이 순간이란 시간 안에 있다. 가끔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세상을 다니는 사람을 우리는 인간적이라고 불러야 한다.

프로야구도 우천 중지,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고 하니까 오히려 기분이 편해졌다. 뭐든지 이렇게 다 같이 당하면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 우리들의 장점일까, 단점일까. 불행이나 대박도 그런 거라면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어쩌면 우리는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하고 다 행복한 세상을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공평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공평하지 않을 줄 알고 있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엇을 남길까. 초조해서는 다음을 기다릴 수 없다. 비탈은 초조를 낳고, 살아간다는 말은 다음을 기약한다. 우리의 불안은 비탈에 사는 우리의 현실에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랬다는 말은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말처럼 황량하다. 초조한 마음들이 모여들수록 경쟁이 치열한 세상이 된다. 비탈을 깎아 평탄화시킨다. 그리고 건물을 높인다. 그러나 비탈인 것을, 5월에 비가 유난히 많이 내리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원이 많다. 원하는 것이 많다. 그대의 소원은 무엇인가. 지금 그 소원은 언제까지 유효한가.

중요한 것은 혼자서 견뎌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는 같이 있으면서 따로 있는 존재다. 물소 무리가 한 곳에 모여 풀을 뜯고 있어도 사자 한 마리가 달려오면 저마다 살 길을 찾아 흩어진다. 같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것이야말로 신기루다. 약한 것들은 그렇게 서로 의지한다. 실체도 없이 금방 사라지고 말 것을 방패 삼고 믿는다. 죽음을 속이는 삶의 방식이 거기에 있다. 혼자서 비탈을 견디는 소년, 토오노 카오루와 혼자서 다음을 준비하는 소녀, 하나시로 안즈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봤다. 겨우 두 사람을 소개하는데 이렇게 많은 문장을 소비하는 나도 중증이다. 누가 이런 영화를 보겠는가. 시간을 다르게 살지 않는 한.

우라시마 터널이란 데가 있다고 한다. 떠도는 전설이다. 터널, 이거 인간적이다. 통하는 것, 연결하는 것, 그리고 상상이 된다. 여기에서 저기로 훅 날아갈 것 같고 소년이 소녀와 통할 것 같고 어둡지만 밝음이 작가의 친필 사인처럼 반짝이는 소설책 같다. 거기에 가면 원하는 것은 뭐든지 얻을 수 있다고 그런다. 대신 100살을 먹어버린다고 한다. 잘 알겠지만 보물은 보물 같은 사람에게만 보인다. 그러니까 보물은 늘 불안정한 상태다. 보물을 만나야 보물이 되는 이치는 조물주가 사람을 아껴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믿게 한다. 세상을 아무리 분리하고 나눠도 끝에 마주할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비탈에서 깨닫는다. 사랑 없이는 비탈에서 미끄러질 테니까.

카오루와 안즈가 비탈을 견디는 이야기다. 둘은 절대로 포클레인을 불러 땅을 파지도 다지지도 않는다. 영화 리뷰를 하는 것처럼 차려놓고 야바위 판을 벌리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도 애니메이션을 봤으면 싶다. 시간은 기다리며 견디는 마법의 대상이다. 둘은 시간을 이겨낸다. 나머지 이야기는 장식이다. 고급 요리는 한 점의 맛으로 승부를 낸다. 아슬아슬해도 처음부터 기울어졌어도 벽돌집처럼 서로 어긋나게 쌓아 올렸어도 탄탄하게 견디는 것들이 있다. 나는 그것을 맛이라고 부르고 멋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다. 우라시마 터널이 우리에게 주는 소원은 세상에 없던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던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없는 것이다. 나는 우라시마 터널을 늘 거닐고 있는 사람이다. 그대의 소원을 돕겠다. 그대, 무엇을 소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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