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너무도 파랗습니다.
5시에서 6시는 영어를, 6시에서 7시는 태권도에 가고, 7시에 수학 학원에 가면 8시에 마친다.
오후 4시 반은 저녁을 먹기에 이른 시간.
한참 키가 커야 하는 중학교 1학년에게 라면을 끓여주면서 미안함과 애틋함이 같이 끓어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까지 산이는 아빠하고 냉랭한 분위기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머무는 날이 많은 아이들이다.
나는 몸이 아픈 이후로 집 밖에 나서지 않고 거의 모든 생활을 실내에서 해결하며 지낸다.
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만 그 마음이 해석에 따라 하루에도 수많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거린다.
어느 높이든 거기에서 바라보이는 풍경은 제각각이다.
따뜻하기도 서늘하기도 비가 내렸다가 바람이 불었다가, 그렇게 지나가다가 나만 혼자 우뚝 서있는 날도 있다.
애들 엄마는 이런 판국에 집에 어른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며 나를 돕는다.
무슨 일에든 좋고 나쁜 것을 섞어 해석의 여지로 남겨놓는 조물주의 깊은 헤아림을 손끝으로 만져보는 시간들이 우리들 사이에 있다.
'인간은 이리도 슬픈데 주님, 바다는 너무도 파랗습니다.'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말에 기대 나도 한마디, '일상은 이리도 새침한데 주님, 세상은 가을입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내다본 하늘은 높고 커튼 뒤에 비치는 실루엣처럼 다가오는 먼 데 있는 산들.
투명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화가 났던 나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에효, 뭐한다고 그랬던가 싶은 것이다.
발단은 이렇다.
12시에 점심을 챙겨주고 갑자기 약속이 생겨서 외출을 하고 돌아온 시간이 1시 반.
오후에 심심할 때 간식으로 내줄 생각에 도넛도 사 갖고 들어왔다.
식탁에는 김치가 두 종류, 마른 김, 국그릇과 밥그릇, 깻잎 하고 계란 프라이가 놓였던 접시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먹었던 그대로 그릇들이 얌전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였다니.
나는 나를 기다리는 것들에게 달달하지 못한 쓴 커피같은 사람 아니던가.
모르겠다.
나는 몇 살부터 내가 먹은 밥그릇과 반찬들을 치우기 시작했는지 기억해낼 수 없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장사를 했고 두 분의 삶이 무척 바빴고 덩달아 우리들의 시간도 그와 닮은꼴일 수밖에 없었던 차일드후드 childhood.
먹으면 치우는 것이 도리였다.
나는 바쁘지 않아서 산이와 강이에게 밥그릇을 치울 시간도 내어주지 않고 살았던 것일까.
아이를 불렀다.
아니 부르기 전에 벌써 화가 났다.
쓴맛이 출렁거렸다.
"이것은 누가 치우라는 거냐?"
그래, 지금이니까 인정한다.
내 말은 처음이 잘못됐다.
공격적이었으며 비난하는 말투였고 감정이 실린 말이었다.
바삭하게 맛이 좋던 들기름 바른 김이 뚜껑이 열린 채 그렇게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더 약이 올랐다.
김치는 생기를 잃었다.
밥그릇에 남아있던 밥알들이 다 말라버린 것이 눈에 박히고, 반쯤 마시다 만 물컵이며 아무렇게나 흩어진 수저와 젓가락들도 거슬렸다.
아, 궁상스러운 것들.
"이것은 누가 치워야 하는 거냐?"
하지 않던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산이는 어렸다.
아직 커피맛을 모른다.
더구나 어린애들은 상황을 읽지 못한다.
눈으로 보면서도 못 보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 말은 정말 기분 나빴다.
"엄마랑 아빠도 그냥 놔두잖아?"
할 말을 잃고 개수대 앞에 서서 다시 멀고 파란 하늘을 보았다.
수도꼭지를 틀고 세재를 묻혀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그게 할 소리였다니...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린 아이를 향해 소리쳤다.
"앞으로 네 것 네가 챙겨서 먹고 씻어놔."
소용없는 말을 쏟았다.
그것이 또 성이 차지 않았다.
"니 맘대로 하고 싶으면 나가서 살아."
결국 가장 유치한 자세로 커피를 쏟고 말았다.
산이도 강이도 꼼짝하지 않고 시계 소리만 깍깍 울어댔다.
아침밥을 거르는 집이 많다.
가끔 아침을 늦게 먹는 일은 있어도 우리 집은 아침식사를 꼭 하는 편이다.
그게 귀찮을 수도 있을 텐데 애들 엄마가 부지런을 떠는 덕분에 우리는 아침밥을 먹는 족속들로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부터 아침 먹는 것이 습관이나 선택이 된 시대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런 것도 이기적인 어떤 것인지 이 울타리 안에서 지켜가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아침밥이다. 나는 아침을 먹어야 건강하다고 믿는다.
사운드 sound, 내가 믿는 건강은 영혼까지 책임지는 밥 같은 것이다.
Sound mind sound body.
생각해 보면 밥 먹을 때 그나마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사람다움을 말하는 이야기.
삶에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그러는데 우리들 일상 어디에 철학이 있는가.
인문학, 인문학 강연장에서 떠드는 유명한 인문학만 인문학인가.
나는 아이들과 밥 먹을 때 하는 이야기가 즐겁다.
더 많은 이야기가 기대되고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아도 가만 지켜보는 사회가 아니다.
따라오지 않으면 내버려 두는 사회에서는 힘날 때마다 쫓아가야 낙오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밥이라도 먹어가면서 서로 알아둬야 하는 것이다.
그의 철학도 그의 꿈, 계획, 호불호, 농담까지 다 모아야 겨우 한 사람, 그 사람 아니겠는가.
그래, 이렇게 곁가지를 따라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빠는 그것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어!
밥 먹는 이야기를 하고 나니까 널려 있는 반찬통을 보고 화가 났던 것이 왜 그랬냐 싶다.
역시 인간은 이리도 나약한데 삶은 얼마나 거룩한 것이냐.
아빠가 그랬잖아.
누군가 밥을 하면 그게 고맙고 거룩하다고.
나는 숟가락이라도 놓고 젓가락이라도 반듯하게 놓으려고 해야 한다고.
거기서부터 밥을 감사하게 먹겠다는 기도가 되는 거라고.
같이 하는 일이어야 한다.
함께 산다는 것은 차리는 일, 먹는 일, 치우는 일은 같이 한다는 뜻이다.
오후 4시 반에 산이에게 화해하는 마음을 담아 라면을 끓였다.
산이는 꽃게를 좋아한다.
아침에 먹고 남은 꽃게탕에서 꽃게 하나를 건져 가위로 잘라 라면 위에 보기 좋게 올렸다.
나 원래 이런 말 못하는 사람인데 자식에게는 일부러 연습 삼아서 던진다.
기회다 싶으면 창피한 줄 모르고 냅다 꽂아넣는다.
"산이야, 아빠가 화내서 미안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기운이 다 떨어지는 시간,
애들 엄마도 바쁘게 살다가 집에 돌아와 식탁에 앉아서 한 숨 돌리는 시간.
맞은편에 앉은 나를 보면서 웃는다.
'왜?"
그냥 웃는다.
"왜?"
그냥 웃다가 그런다.
"산이한테 사과했다면서요."
할 말이 없었다.
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