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더미를 치우다가 멈춰 섰다. 창가 쪽에 쌓여 있는 책들을 뜬금없이 옮겨주고 싶었다. 하루가 다르게 날이 더워지는 것을 몸으로 느끼는 계절이다. 어제는 감자를 다 얻었다며 알이 굵은 감자를 아내가 보여주던데 어느새 여름이 왔다고 한 마디씩 터뜨릴 것이다. 볕이 키우는 혹은 볕 아래에서 바래가는 것들을 살피는 오후. 무엇이든 오래 머문 자리에는 그 흔적이 남는다. 시간이 머문 자리들 - 둥글고 기다란 선인장이 나란히 서서 하품을 하는, 책 머리와 배가 하얗게 나이 먹은, 그리고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강물처럼 너도! - 을 챙긴다. 귀찮겠지만 잠시 바람 좀 쐬는 것이 좋을 거 같다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늘에 좀 가 있어, 시원해서 좋을 거야. 볕이 좋아도 늘 정도가 있다. 길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고 아이스크림도 커피도, 무엇이든 뭐든 그렇지 않던가? 가장 늦게까지 가장 덜 차올랐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화분 옆에 작은 성경책도 자리를 깔고 거기 머문 지 얼마나 됐을까, 성경책도 좀 재미있다 싶을 것이다. 한 칸 건너면 돈황본 육조단경이라고 떡하니 간판을 내건 가게가 하나 있으니까. 난 저 가게에 아직 들어가 본 적도 없다. 그저 시절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 그럴싸하게 들리지 않을까 싶다. 책으로 벽을 쌓는 습관은 어디에서 왔던가, 어리고 어린 시절 4남매 정도 함께 자라는 집에서는 그런 밤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친척 집이든 어디든 모처럼 외출하고 늦게까지 집을 비우는 날, 벽장에 있는 이불이란 이불은 다 꺼내놓고 그것으로 벽을 쌓아 올려가며 자기 집을 한 채씩 마련하고서 흡족해하던····
사람은 본성이 그런 것인지 그렇게 널브러져 있다가도 더 좋게 지은 집을 살살 건들어서 무너뜨리고 그러다가 베개를 들고 휘두르는 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이 한 번 일어나면 삽시간에 온 방안이 아수라장이 된다는 것을 서로 잘 알면서도 그 통쾌하고 신산스러운 재미를 떨치지 못한다. 그러다가 더 힘센 누나나 형이 점령군처럼 행세하는 것이 못마땅하면 동생들이 연합해서 2 대 1, 3 대 1로 툭탁거리는 밤. 결국 모든 전쟁은 어느 한 편이 울고 다른 한 편은 괜히 그랬다는 후회에 빠지면서 지지부진해진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늘 불현듯 나타나 목격하지도 않았던 낱낱을 손금 보듯이 읽어버린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항복, 전쟁은 끝나고 나이를 한 살씩 받아먹었다. 그렇게 자리를 비우는 일은 전율이 있으니까 너희도 콧바람 좀 쐬어라.
강이가 이 책을 내게 건넸던 것이 언제였는지 전혀 생각이 안 난다. 어른은 잘 잊어버리는 사람들, 내가 분명히 고맙다며 감동적이었는데, 여기에 놓아두고 잊었었구나. 하필 책 더미 맨 아래에 이렇게 두었을까. 힝이다, 힝.
거기 생태 환경 이야기라는 굵고 큰 제목 아래에 네모난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아빠!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이야. 아빠도 한 번 읽어 봐!" - 강이가.
나는 저 이름이 마음에 든다. 내가 지은 한 글자 이름, 가장 쉬운 이름이면서 가장 오래 기억되는 이름, 'ㅣ'
그 이름이 웃는다. 그리고 미안하다. 내가 한 페이지도 읽지 않고 여기 두고서 햇볕만 봄, 여름, 가을, 겨울 쬐였구나. 그것이 또 몇 해나 됐을까 생각하면 바로 쥐구멍으로 찾아들어가야 할 거 같다. 오, 삶은 이렇게 완성되는 것을.
볕이 드는 자리를 물을 묻혀 닦아준다. 후회와 부끄러움은 이렇게 찬물로 씻어내는 것이 최고다. 움직인 김에 책에 쌓인 먼지도 털고 자리를 바꿔준다. 자리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세도 바꾼다. 한쪽만 그을린 사람이 웃긴 것처럼 저희끼리도 속닥거릴 것 아닌가. 책과 아이들, 그 둘은 내게 아릿한 감정을 일으킨다. 새벽에 읽었던 수필에서 어릴 적 '들장미 넝쿨이 우거진 대문'을 찾아다녔던 어린 소녀, 그 소녀에게서 결핍된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꽃'이었다는 말에 나도, 그러면서 끄덕였는데 그 결핍은 어른이 되고서도 채워지지 않는다는 말에 또 한 번 나도, 그러고 말았다.
책이 많은 곳을 동경하고 책을 많이 읽는 친구들이 나와 다르게 보였다. 내가 계층이란 말과 빈부를 배우게 된 것은 책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 그것을 깨우쳤다는 것이 아니라, 책이 있는 집을 보면 부자, 책을 읽는 사람을 보면 잘 사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내가 갖지 못했거나 부족한 부분이야말로 나를 설명하는 가장 쉬운 길일 것이다. 사람은 그 길을 떠나지 못하고 거기를 지나다니다 길이 되고 만다.
불을 꺼달라는 말을 강이하고 이야기 나누다가 깜박 잊었다. 감자 익는 내가 폴폴 난다. 강이는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식탁에 앉았는데 산이는 이제 씻고 있다. 오늘도 아침을 먹지 못하고 학교에 갈 것이다. 아내는 속상했는지 자기 탓을 한다. 자기 닮아서 그 모양이라는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 나를 인정한다. 새벽 파수꾼, 강물처럼!
아침 일찍 밥을 짓고 출근하는 아내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아니라고, 누구 닮은 것이 아니야. 석가모니는 석가모니를 닮은 것이지, 그래서 석가모니가 된 거라고. 결코 그 아버지나 어머니를 닮은 것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다고.
시간이 지나면 산이도 자신에게 부족했던 것과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지금 나처럼 떠올리는 날이 올 것이다. 산이는 무슨 생각이 들까. 그때도 아침밥도 못 먹고 일하러 나가고 있지나 않을까····
안개가 자욱한 아침이다. 육아 일기라는 말이 어색해도 한참 어색해졌다. 육아育兒는 언제까지가 육아냐, 묻고 묻는다. 아이가 아이일 것 같다. 내가 예순이 되고 일흔, 여든이 된다면 그때 솔직하게 적어볼 것이다. 나는 어른이 됐는지, 아직 내가 어른이 되지 못했다면 산이와 강이한테는 아예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