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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May 22. 2024

그런 데가 아니다

某也視善


강이가 오래전에 권했던 책을 읽는데 두 가지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먼저 책에서 다루는 생태와 환경, 제목 그대로다. 생태와 환경이란 말은 마치 엄마 같은 인상을 우리들에게 건네고 있었다는 깨달음이었다. 속으로는 온갖 것들을 겪어내면서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어쩌면 저 말이 가진 포근함, 원시성, 또는 고향이란 말처럼 울리는 너그러운 바탕이 우리를 초조하게 몰아세우지 않는 것 같았다. 생태는 세상이 생겨나는 자궁 같고, 산달이 다가온 엄마의 배를 연상시키는 환경이란 말, 여성성, 모성母性이 비치는 말들은 더 늦게 사람들 시선에 포착되는 것은 아닐까. 늦게서야 병원에 찾아가는 엄마처럼 견딜 것 다 견뎠다가 더 어쩌지 못할 때, 그때도 괜찮다며 재촉하지도 않고 뒤에서 따라오는 엄마, 엄마들. 상태가 심각한데 왜 우리는 이것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엄마가 이 정도로 아픈데 어째서 병원에 올 생각을 못 했을까. 살던 대로 살아서 그런다. 하던 대로 하고 가던 대로 가고 먹던 대로 먹고 쓰던 대로 쓰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호칭을 좀 바꾸면 어떨까. 생태 대신에 '나', 환경 대신에 '우리'. 나는 죽어가고 있어요. 우리는 멸종하고 있어요. 그래도 듣지 않으면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까. 초등학생 강이가 읽었던 책에 나오는 대목들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 이처럼 생태계는 어느 하나가 부족하거나 넘쳐서도 안 돼. 꼭 필요한 만큼 있어야 하고, 그리고 서로 어울려 살아야 해. 보잘것없으니까, 해로우니까 없어져야 한다거나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는 거야. 어느 한 종의 멸종은 결국 도미도처럼 영향을 미치거든. 결국 지구촌 생물들이 함께 살 수 있도록 돕는 게 인간과 생물 모두 행복해지는 길인 거야. 19p.

- 토끼풀과 개망초도 외래 식물이야. 외래 식물이 토종 식물처럼 정착하여 계속 살고 있으면 '귀화식물'이라고 불러. 45p.

여태 개망초를 보면서 한국적이라고 믿었다. 이제 와서 한국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따지는 것이 아니다. 토끼풀은 언제나 정감 있다. 당연하게만 바라봤던 것들을 새로 알게 해줘서 고마운 생각에 거기에도 밑줄을 그었다. 귀화식물, 그렇게 부르는구나. 너희들을.

- 그렇다면 꿀벌의 면역력은 왜 그토록 약해진 걸까? 그것은 많은 스트레스 때문이었어. 양봉꿀벌은 들판의 꽃을 찾아 자유롭게 날아다니지 못하고 꽃가루받이를 위해 벌통에 갇힌 채 실려 다녀야 해. 꽃꿀 대신 옥수수 시럽을 먹어야 하고, 살충제와 항생제를 맞아야 해. 양봉꿀벌은 가축처럼 사육 당하고 있었던 거야. 그 스트레스로 약해졌고, 결국 약한 바이러스에도 쉽게 감염되어 모두 죽었던 거였어. 88p.

사람들도 많이 약해졌고 시달리고 힘들어한다. 아토피, 비염, 천식, 당장 우리 집 아이들도 이 약, 저 약 번갈아 가면서 고생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정신과 약들을 사람들이 먹어야 할까. 우울증이란 말과 신경과민은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생겨난 증상일까. 강이가 몇 해 전에 건네줬던 책을 읽으면서 번져가는 것이 있었다. 전쟁이나 불길같이 집어삼키지 말고 새로운 생각, 의지 같은 것들이 물처럼 흘렀으면, 그랬으면 싶었다.

- 쓸모없다고 베어 내던 꿀벌의 주식인 아카시아를 보호하고, 지구온난화도 줄여서 꽃이 한꺼번에 피는 것을 막아야 해. 91p.

아마 더 이상 아카시아를 보면서 없어져야 할 것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 같다. 문득 가톨릭 문우회 이희근 선생님이 떠오른다. 남해에 다녀오는 날에 아카시 나무에 대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선생님이셨는데, 건강은 괜찮으신지 모르겠다. 다 잘라 없애야 한다는 말은 잘못된 거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일러주셨던 날이 생각난다. 선생님이 쓴 글, 한 대목을 곁들이며 더불어 선생님의 건강도 빈다.

개오동은 오동나무가 아니다. '개'가 붙어서 질이 떨어지는 오동나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잎이 오동잎처럼 넓적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속칭일 뿐, 과科가 전혀 다른 별개의 나무다. 오동나무는 현삼 과요, 개오동은 능소화 과다. - 이희근, 피서지에서 만난 秋氣 가운데.

강이가 준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또 하나는 어렸을 텐데, 어린 너에게도 이런 말들이 깊이 흘렀구나, 아파 보였구나. 걱정이 되었나 보구나. 애상감哀想感이 들었다. 어린것과 잠시 일체가 된 느낌이었다. 아이가 느꼈을 마음이 내게로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아이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 끝에 얼른 가서 서 있고 싶었다.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표지가 되어 길을 알려주고 싶었다. 너는 잘 가고 있어, 두려워하지 마. 네가 가는 길에는 내가 있을게. 그런 영화 대사 같은 말이 토도독톡 써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말을 안 하면 어떻게 아냐고?' 그런다. 여자든 남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마음만 갖고는 살아지지 않는 세상이다. 표현해야지, 말을 해야 알지, 우리가 늘 하는 말이다. 생태나 환경을 위한다면, 아니 더 나빠지고 싶지 않다면 우리도 표현해야 한다. 그동안 못하고 산 것까지 다 해보고 살아야 한다. 아낌없이 사랑해야 한다. 여기는 우리만 살고 끝나는 그런 데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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