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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May 23. 2024

新  밥상머리 38

밑줄 긋는 순간


토스트를 구우면서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행주로 훔쳤다. 식탁에 나왔던 반찬도 하나씩 다시 냉장고로 들어갔다. 선물 상자가 비워지는 것처럼 식탁에 빈자리가 드러났다. 10분 전에 이쪽 하늘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던 강이, 그 자리를 한 번, 두 번. 산이가 우유를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던 자리도 한 번, 두 번. 내가 앉았던 자리에는 두부 요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아직 식지 않은 것을 들어서 한쪽에 옮겨 놓고 거기도 한 번, 두 번 닦는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기 때문이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곗바늘이다.*

잠시, 여행을 떠나듯, 잠시 멈춰도 좋을 것 같이 조용했다. 오늘 내 여행은 여기서부터다. 잠깐이면 된다. 멀리 금방 멀리 다녀올 생각이다. 그것도 갈 수 없는 곳에, 가지 못하는 섬에 다녀올게. 지금 출발해야 돼. 저 문이 닫히기 전에. 이따가 보자.

"오늘 원대에서 전국 작은 도서관 관련자 회의가 있거든요."

저쪽에서 아내가 아침을 차리고 있을 때 나는 장석주의 오래된 산문집을 베껴 쓰고 있었다. 첫사랑이 나오는 대목에서 멈추고 식탁으로 다가갔다. 노트북 화면이 꺼지고 절전 모드로 깜박, 깜박.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을. 음, 그리워 말아요. 떠나갈 님인데.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슬퍼 말아요.*

남쪽이다. 여기서 하늘이 보이고 내 뒤로는 공간이 멀어진다. 외투가 걸쳐져 있고 얼마 전까지 허리에 둘렀던 보호대도 의자 등받이를 두르고 있다. 내 자리,  앞에는 토스트가 아니라 된장국이 놓인다. 넓지도 않은 식탁이 둘로 나눠진다. 밥을 먹는 사람과 빵을 먹는 사람들, 나이 든 사람과 청춘들, 기억과 꿈들, 특별할 것 없는 나와 특별한 너들. 세상에 그토록 많은 너라는 사람들 중에서 애절하게 또는 환희가 되는 내 앞에 앉아 있는 아이들. 그 아이들 입에 빵이 들어간다. 치즈 크림을 좋아하는 표정들 위로 노래가 흐른다. 엄마 품이 아무리 따뜻하지만 때가 되면 떠나요. 알 수 없어요.*

"정말 사람들이 그걸 몰라요. 오늘 참석 안 하면 지원을 못 받는다니까 가야 하거든요."

아파트 관리소장을 하는 아내는 언제쯤 그 일을 그만둘 수 있을까. 아내는 주민들의 민원을 받고 나는 아내의 민원을 듣는 구조다. 내 민원인은 다행히 악성은 아니다. 가만 들어주면 편안해지는 민원인이다. 가끔씩 여기가 병원 같은 데 아닐까, 내 자리에 어떤 '오은영'이 앉아 있는 것은 아닌가 웃기도 한다. 아내는 그런 면에서 순한 편이다. 치매도 예쁜 치매가 있다고 그러는 것처럼 삶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가락으로 튕기고 두드리며 노래로 엮는 사람들, 누군가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래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산다면 운이 좋은 것이다. 뒤끝 없다면서 큰소리로 우는 사람은 언제 또 울지 몰라서 조바심이 난다. 표정 없이 지내는 사람은 볕이 좋아도 그늘이 진 듯해서 서늘하고 그 서늘함의 끝은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그래서 찔레꽃 같은 아내가 떠드는 소리는 다 못 들어줘도 가만 듣는다. 듣고 있으면 주름이 펴지는 것이 있다. 내 가슴에도 저 가슴에도. 엄마 일 가는 길엔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거기야, 거기가 신기해. 사람들이 모르는 곳을 가꾸고 일구는 데 보물이 있는 거 같아."

뜬금없는 말이 껍질을 깨고 나왔다.

"보물은 이게 보물이다, 그런 건 아닌 거 같아. 사람들이 몰라주는 일을 챙기는 것이 그냥 되는 것은 아니거든. 그걸 할 줄 아는 사람, 해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인 거 같아. 애들도 혼자서 공부하는 애들이 진짜 공부 잘하잖아."

그런 것을 느낀다며 말을 더 끌었다. 가끔씩 구독자 같은 것을 떠들어 보기도 하거든. 어떤 사람은 글을 쓴 지 한 달 만에 구독자가 오백, 천, 그런다고 하더라고. 나는 굳건하게 50을 지키고 있거든. 너무 글을 못 써서 그런가 싶다가도 누군가 오랫동안 하트를 달아주고 그러면 다시 쓰고 싶어 지니까, 그것으로 됐다 싶더라고 내 신상을 밝혔다. 독자 없이 게시글 천 개를 향해 가고 있는 항해자. 강물처럼.

"그런데!"

아내가 돌아봤다. 아내도 내가 말하는 습관을 꿰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밑줄 긋는 순간인 것을.

"그런데 그게 맛이 있더라고. 심심한 맛. 산 것 같지 않게 사는 맛. 사막 이야기 많이 하잖아. 사막에서 뿔뿔이 헤어져 본 사람들이 물이 어떤 맛인지 안다고. 그게 무엇인지 안다잖아. 나는 계속 사막을 걸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그때 많이 덥거든, 갈증도 나고. 혹시 죽을 수도 있을 것이고. 내가 믿는 것은 그럴 수 있다는 지점이야. 그것을 무모하다느니, 위험하다느니, 불행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건 그 사람들의 선택이고 나는 나로 잘 가고 있는 거거든."

내가 믿는 것은 실력이 아니라 우연이라고 말했다. 나는 우연을 마주치고 싶지, 실력 있는 사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편한 것이 있고 그래서 흔들리기도 하는데 그 맛이 나름대로 좋다고.

내 앞에다 두부 요리가 든 접시를 내려놓는 민원인이 끄덕인다. 새로 만들었다며 맛을 보란다. 맞아요, 정말 그래요. 이쯤 되면 잘 해결된 민원이다. 사실 겉으로는 내가 도움을 준 듯해도 정작 도움을 받고 좋아진 사람은 나인 것을 나는 안다. 이런 민원 환영이다.

빵을 하나씩 물고 있는 산이와 강이에게 퀴즈를 냈다. 여기 있는 이거하고 강이하고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뭘까? 강이가 산이에게 선수를 쳤다. 겉모습이 닮았다거나 그딴 소리는 하지 말기! 산이가 한 술 더 뜬다. 어? 어떻게 알았지, 서로 닮은 것을? 그러면서도 곰곰이 말이 없다. 뭘까? 그 표정이다.

"이건 오이, 너는 강이. 둘이 성은 다르지만 이름이 같아. 앞으로 친하게 지내면 좋을 거 같아."

심심하고 열없고 재미도 없는 아재 개그를 받아주고 학교에 등교한 녀석들이 고마워서 잠시 여행을 다녀왔다. 10분 전으로, 산이와 강이가 어떻게 알았지? 그러던 순간으로.

장석주 시인이 쓴 시를 한 편 적고 이 글을 마무리하면 그럴듯하겠다. 밑줄 긋고 싶은 말들이 많은 삶을 떠나고 싶다.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 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 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보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상처받는 일과 나쁜 소문,

꿈이 깨어지는 것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벼랑 끝에 서서 파도가 가장 높이 솟아오를 때

바다에 온몸을 던지리라.

-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 장석주

감히 생각한다. 모든 순간이 첫사랑인 것을. 그 노래를 부친다.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내 맘에 고독이 너무 흘러넘쳐, 눈 녹은 봄날 푸르른 잎새 위에 옛사랑 그대 모습 영원 속에 있네.*

* 모모

* 하얀 민들레

* 하얀 나비

* 찔레꽃

* 옛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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