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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May 27. 2024

소요유逍遙遊, 그 속에서 고요해지고 싶은 -1

우리가 걸으면서 나눈


소요유 逍遙遊, 그 속에서 고요해지고 싶었다 - 1

토요일 오후였다. 계절은 지구가 기울어져서 생겼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밖을 살폈다. 어쩌면 내 자리에서 가장 멀리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근방을 상상했는지도 모른다. 거기는 밤이 길어졌겠다. 가본 적 없는 땅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센다. 이런 식으로 내게 허락된 것들을 감상하고 웃고 걸어보는 일, 시간이 나를 끄덕이며 바라봐 주는 시간이었다. 4시 40분, 아직 밝아서 그대로 나왔다. 모자와 물병, 혹시 몰라서 과일 주스를 넣고 그리고 아내도 챙겨서 서둘러 나왔다. 해가 있을 때.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달렸다. 보리가 다 익은 지평선, 이 보리를 가져다가 옛날 배고팠던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면 '보릿고개 전설'이 하나 생겨나겠다. 그러겠다, 차림도 이상한 사람들이 와서 보리를 이렇게 퍼주고 그냥 갔다고 얼마나 신기해할까. 방금 전에는 아르헨티나까지 다녀오더니 이번에는 1960년 5월 3일이었다. 녹슨 양철문을 살짝 들고 들어서면 왼편으로 장독이 서너 개 놓여 있고 그 끝에는 감나무 하나가 초록 잎을 내고 있다. 돌담을 따라 열 걸음쯤 지나서 외양간이 비어 있다. 어디 갔을까. 주위에 인기척이 없는 마당에 서서 마루를 바라본다. 검은 칠이 벗겨진 마루 한쪽에 조롱박으로 만든 바가지가 유난히 크고 늙어 보인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아니 모든 것이 그럴지도 모른다. 모든 것의 바탕색이 되는 시간이 상대적이라면 그 바탕 위에 그리는 그림이며 그 바탕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흐물거리지 않을까. 옥산을 향해 달리는 이 도로는 과연 언제까지 직선일 수 있을까. 내가 앞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알아볼 수 있을까. 시간 너머에서 바라보는 여기는 어떤 옛날일까. 청춘일까, 중년? 아니면 노년일까.

실컷 기다리기로 했다. 먹을 것이 입에 들어오는 순간만큼 황홀한 때는 없으니까. 내 기다림이 그들에게 환희가 된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마당에 별을 그렸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많이 많이.

나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아닌 곳에서라면 언제나 행복할 것 같다. - 보들레르.

사람은 보들레르처럼 말할 때가 있다. 그리고 놓친다. 지금이 문제가 아니라 나는 '내가' 그 부분이 문제인 것을 또 많이 많이 지나서 알게 된다. 사람이란 '나는' 어디를 가든 보들레르의 말을 반복해서 세상에 던질 것이다. 마치 '내가' 아니라 세상이 잘못이라는 듯이.

평소에는 2시간 15분에서 25분 걸려서 청암산, 군산 호수 둘레길 9.4km를 한 바퀴 걷는다. 지금 5시 04분, 7시를 넘기지 말자고 말했지만 그럴 수 있을까. 주차장도 한가로웠고 우리는 길에 들어서는데 사람들은 길로 나왔다. 걷고 난 얼굴에는 걸었다는 스탬프가 제각각 표정으로 찍힌다. 걷고 저 표정을 받는 것이지. 살아가는 것도 아마 그와 비슷하겠지. 그러겠지.

두 군데를 변경했다. 그러니까 청암산을 둘러싼 군산 호수는 크게 수변로와 등산로, 두 개의 길이 서로 엮였다가 흩어지면서 호수를 감싼다. 수변로는 물가를 따라가느라 구불구불 나오고 들어가면서 걷는다. 13km가 되는 수변로를 그대로 따라 걷는다면 4시간도 걸릴 수 있다. 길은 평탄하고 물이 가까이 있어서 한눈팔기에 좋은 탓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약점이 있다. 그래서 수변로를 따라 걷다가 짧게 몇 군데 끊어 걷는 경우가 있는데 어제는 두 군데 더 그렇게 걸었다. 시작해서 30분쯤 지날 무렵에 길에서 벗어나 계단 몇 개 있는 낮은 능선을 하나 넘자 곧장 대나무숲이 펼쳐졌고, 이번에는 거꾸로 길이 다 끝나갈 무렵, 수변길 대신에 오르막 등산길을 택하고 거기서 또 20분 정도 시간을 벌었다. 어두워지는 것은 가능한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라서, 더구나 동행하는 저 여인은 연상이니까 내가 좀 더 신경 써야 한다. 농담이고 사실 음료수든 먹거리도 다 아내가 챙겨서 내내 메고 다니는 우리 실정이다. 길을 보고 하늘을 보고 시간을 보는 것이 내 임무로 맡겨져 있다. 말하자면 나는 운전을 하고 아내가 연료며 자동차의 상태 그 밖의 모든 것을 살피는 것이다. 그러니까 황정민 식으로 차려 놓은 밥상에 수저 하나 들고 자리에 앉는 그 사람이 바로 나다.

지름길을 하나 돌고 대숲을 지나서 작은 숲 속 삼거리가 나오기 전에 그러니까 길이 갑자기 넓어지기 전,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 뒤에서 늘 밥상을 차리는 사람 - 아내가 "아, 좋다" 그러는 것이 들렸다. 쑥개떡 하나에도 다 들어 있어서 '맛있는' 것인 줄 우리는 안다. 거기 들어 있는 쑥만 해도 온갖 좋은 바람이며 기운, 비와 이슬, 계절이 들어있고 그것을 그냥 쪄서 먹는 것도 아니다. 손으로 조물조물 다듬어서 참기름도 발라 내오는 떡 아니냐. 아니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어머니는 10년 전만 하더라도 봄이면 쑥을 캐러 다니시지 않았던가. 지금은 거동도 제대로 못하는 어머니가 믿었던 먹거리들, 마늘이며 쑥은 그러고 보니 '사람'을 만드는 것들이다. 자기 손으로 농사지은 마늘로, 산으로 들로 다니며 직접 캐 온 쑥이며···· 어머니의 구원 등판이었다. 암 수술까지 받고 위기에 몰렸던 나를, 우리 식구를 어머니는 그렇게 도왔던 것이다. 나는 좋아졌고 어머니는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어떻게 모든 기억이 좋을 수 있을까. 어머니가 편안한 기억들만 주로 갖고 지내셨으면 한다. 늙어버린 육신이 감당할 수 있는 작고 소박한 기억들만 짤랑거렸으면 싶다.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내어줄 것이 없다. 농사지을 것도 쑥을 캐 본 적도 없다. 그저 어디 가서 밥을 한 끼 먹더라도 - 된장국이며 김치, 간장 맛 하나까지도 - 어머니가 차렸던 밥과 찬이 내 기준이 된다. 이 맛은 비슷하고 이 맛은 다르고, 어머니가 했던 것들을 내 안에 있는 감각들이 꼼지락거리며 냄새를 맡고 입을 벌리며 덤비는 것을 가만히 다독거린다. 조용히 밥알을 씹고 침을 발라 삼킨다. 밥맛이 평준화된 것처럼 들쑥날쑥 떠드는 것도 없이 입안이 조용하다. 자식이 할 수 있는 효도는 그리움밖에 없구나.

나는 '좋다'가 어쩌다가 '아, 좋다'가 되어 세상에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걸음이 산뜻해지고 산속, 호숫가 이 공간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고요해지고 싶었다. 어머니는 기억 속을 거닐고 아내가 뒤에서 걷고 있다. 그리고 좋다고 한다. 그것도 '아, 좋다' 그런다. 그 순간 노자처럼 소요하고 싶었다. 놀면서 걷고 싶었다. 걷는 게 놀이 같았다.

하나를 만들어 내는, 그러니까 지금 이 상태를 만들어 내는 각각의 요소들이 있다고 말을 꺼냈다.

"우리가 잘 놓치고 사는데 쉽거든, 사실은."

그러면서 코로 깊이 숨을 들이쉬며 지금부터 길어질 테니 잘 들어보라는 투로 간지럽게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아아, 아아.

"아침에 찌개를 하나 끓일 때도 전날 밤부터 육수를 내잖아. 육수라는 것도 잘 보면 거기에 다시마, 멸치, 대파, 이런저런 것들이 들어가는 거잖아. 그런데 또 볼까. 다시마는 그냥 다시마가 아니잖아, 어느 바다에서 어떤 물결을 타고 자랐을까. 그런 것이지."

호숫가 오솔길을 인적이 없어 우리들 발자국 소리만 바스락거린다. 수면이 곧 질 것 같은 햇살을 받으며 찰랑거리는 6시 무렵 - 내가 좋아하는 시공간이다, 6시 그리고 호수 그리고 작은 오솔길. -은 세상 어디든 평화를 구하는 기도 같지 않을까. 다른 말을 하더라도 기도로 통하고, 다른 길로 가더라도 기도에 닿는 환희의 순간이 있다. 지금도 DR 콩고 난민촌에서는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살갗이 벗겨지고 움직이지 못하고 죽어가겠지. 16살 리네는 어린 동생들 다섯을 지켜야 하고 아파서 누워있는 엄마를 살펴야 할 테지. 5살 샨쵸가 저만한 아기를 업고 숯공장에 일하러 다녀야겠지. 그런 장면들을 모두 끌어와 호숫가에 앉혀 두고 아른거리고 싶었다. 걸으면서 명상한다고 농담처럼 소개할 때가 있다. 이런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만 리 밖, 수만 리 밖 사람들을 눈에 넣고 머리에, 가슴에 넣고 걷는 날이 생긴다. 사는 방법을 자꾸 묻게 되는 그때가 비로소 사는 것 같아서 살짝 눈꼬리가 젖는다.

"그러니까 물결까지 꺼내고 그 물결의 물결이라든지, 바닷속 지형이라거나 다시마의 고향, 아니면 다시마의 엄마, 씨, 포자, 뭐 그런 것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지."

"내 말은 조화롭다는 것이지. 거기에 있는 것이 신성神性이야. 옛날에 성지를 지켜라, 그러면서 십자군이니 뭐니 내세울 때 교회가 그랬거든, 십자가의 힘을 믿지 못하겠냐고? 그런 신성은 신성이 아니야,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신성이지, 위협하고 과장하고 자기 뜻대로 이용하는 일종의 심리지, 신성神性이라고 할 수 없지."

잘 듣고 있는 것인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것인지 뒤에서 대꾸가 없었다. 뻐꾸기도 철 이른 울음을 운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도 뻐꾸기가 둥지를 틀었구나. 올해는 어느 개개비 둥지에 제 알을 슬쩍 숨겨놓을까. 그것도 운명 같은 것일까.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러다가 캄캄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별을 보겠지, 참! 모기도 많아졌다.

"그 갖갖의 이름들, 하나를 돕는 다른 하나들을 놓치지 않고 챙기는 사람들이 시인이야. 시인詩人,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뜬금없이 시인, 그러고 말았다. 영감이 찾아와야 한다고 그러거든, 시를 쓸 때 다들 영감, 그러는 거 알잖아."

나는 그게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안다. 마치 영매靈媒* 같은 것이라고 안다. 사물과 사람, 세상에 없는 것과 존재하는 것, 마음과 몸이 서로를 알아보는 끄덕이는 일이라고 이해한다. 누군가 꽃에게 말을 걸더라니까 그러면 이해가 간다. 누군가 시를 썼다고 했을 때, 그 시가 울렸을 때, 내가 떠올리는 것은 그 모습이다. 현상을 이루는 점들을, 마치 화소 같은 점들을 일일이 찾아서 점을 찍어대는 손이다. 어떤 손이 애정이 깊고 어떤 손이 부지런한지 시詩가 말해준다.

'아, 좋다.' 그것이 바로 문이 열려라, 그러는 주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 편의 시를 끌어내는 팡파르가 되는 것이다. 벌써 그 마음은 거기 꽃밭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다음은 '아, 좋다.'의 관성으로 흐르는 것이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면 곡이 그려질 테고, 요리를 하는 사람은 어떤 요리가 떠오르겠지. 당연히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뮤즈가 그때부터는 속삭이는 거야. 가만있지 못하게 속살거리는 것이지. 나 혼자 말하고 나 혼자 끄덕였다. 아내는 어디까지 내가 한 말을 들었을까. 어쩌면 시인, 그랬을 때 첨벙 물소리를 내며 사라진 잉어 한 마리를 내내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향기가 그윽해서 어지럽기도 한 것이 5월의 매력이다. 때죽나무 작고 하얀 꽃들이 줄기에 다닥다닥 달려 있다. 저것을 공예로 만들어 장식하면 근사할 것 같다고 일러줬다. 혹시 부자 되고 싶냐고 물으면서 이런 거 한 번 만들어 보라고 또 일러줬다.

"동영상도 나왔고 그런데 이렇게 사진을 찍고 사진을 보면서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꽤 그럴듯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저기 호수를 찍은 사진을 보면서 그 사진을 찍던 순간에 주변에서 들리던 소리까지 찍는 것이지. 녹음이 아니라 소리를 찍는 거, 어때?"

아무 말 없다. 쓸데없다는 뜻인가, 아니면 재미있다는 뜻인가. 어서 가라고 재촉할 뿐 다른 말이 없으니까 그 속을 알 수 없다.

길모퉁이를 돌아서니 사람들이 사진기를 앞에 세워두고 등을 보이며 어깨동무를 하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앞에는 호수가 바다처럼 펼쳐져 있고 키도 비슷한 젊은이들 다섯이서 뒤를 보이고 있다. 우정을 찍고 있다. 아무도 모르게 그 모습을 나도 찍었다. 내가 찍은 사진에는 그 다섯 사람을 찍은 카메라까지 들어갔다. 그 사람들은 우정이라고 기억할 것이고 나는 호수라고 기억할 것이다. 드디어 아내가 한마디 꺼냈다.

"소년 같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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