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덜 들었을까, 안 들었을까?"
아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 조화로웠다. 내 주위를 돌고 있는 이 모두가 하나의 우주로 완성된다. 저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별들의 무리, 은하처럼 빛나는 물결, 하늘은 푸르고 사람은 슬프고 땅은 거룩하다. On Earth As It is in Heaven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소년이어도 좋고 어린애 같다면 더 좋을 것 같은 6시 십몇 분을 지나쳤다. 기록되지 않는 시간이 사금파리처럼 쏟아져 있는 해변, 천국은 그런 곳일 것이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사이에 행복했던 순간들, 그 순간들이 알알이 기대와 경이로 반짝거리는며 철썩이는 파도에 별도 달도 그렁그렁 '엄마'를 불러보는 곳일 것이다.
중간 쉬는 곳에 와서도 쉬지 않고 오르막으로 올라섰다. 오래전 TV에서 봤던 ㅡ MBC 주말의 명화, 기억할 것이다. 오프닝 시그널 뮤직도 기억날 것이다. 제목은 몰라도 - 영화 영광의 탈출 Exodus에 흘렀던 주제곡 - 누구나 '그때'로 돌아가게 하고 '아이'가 되게 만드는 빰빠빠빠, 짠짜짜짜, 짠짜자라라라. 배우들과 장면들이 흘러가며 들었던 그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다. 즐겨 듣는 FM 라디오에서 옛날 영화 음악을 들려주는 행운을 얻었다. 길에서 듣는 음악은 모두 성가聖歌처럼 사람을 돕는다. 아마 거기부터 시간을 잊었던 듯하다. 이제 세상의 7시는 내 마음속의 7시가 됐다. 시간이 마음 따라 흘렀다. 음악을 듣다가 문득 든 생각 한 줄이 정겹다.
'우리는 너무 많이 알아서 더 기다렸거나 너무 많이 몰라서 덜 기다리며 살았던 것은 아닌가 싶어.'
현을 튕기다가 따라라라 불고 나오는 KBS의 토요 명화도 빼놓을 수가 없다. 고조시키고 가라앉히고 따라라 흐르면서 딴따따따, 딴따따따 두들기면 벌써 영화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던 눈동자들. 호아킨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스Aranjuez 협주곡 2악장, 그 클라이맥스. 스페인에 가는 꿈은 아랑후에스라는 이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이든 만들기 시작하면 시간을 잊고서 돌을 쌓아 올리는 스페인 사람들과 그들의 궁전, 그들의 선율이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꿈, 나는 스페인에 간다. 책에서만 봤던 플라멩코도 보고 천재 문학가 세르반테스도 찾아보고, 산이가 좋아하는 안토니오 가우디를 따라 바르셀로나도 가본다. 아내는 산티아고를 가보자고 용기를 낸다. 그거 좋은 생각이지, 싶다.
다른 날보다 서둘러 걸었던지 내일 아침에도 또 오자던 아내가 꿈쩍도 안 하고 누워있다. 일요일 8시가 넘었는데 아무래도 먼저 물에 밥 말아먹어야겠다. 밥 먹을 시간이 지나면 현기증이 난다. 달그닥거리지 않게 간단히 식탁을 차리고 자리에 앉았다. 물도 적당히 따뜻하다. 천천히 우물우물 씹었다가 삼킨다. 밥알이 구른다. 뒹굴뒹굴 떼굴떼굴.
한 번만 쉬기로 하고 제일 힘이 드는 언덕배기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오렌지가 걷다가 먹기에는 효과가 좋은 것 같다. 오이도 좋지만 맹맹하잖아. 달콤하고 시큼한 오렌지 즙이 사람을 살살 녹인다. 왜 좋을 때 그 생각이 났을까. 무턱대고 작은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일기를 보니까 4월 10일에 우리가 찾아뵀더라고. 그 사이에 그럴 줄 몰랐잖아. 아프시더라도 좋지 않더라도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그래요, 맞아요. 옆에 앉은 사람이 그래요, 맞아요 그러면 한동안 서로 침묵하게 된다. 그것도 이상한 사인이다. 그리고 그때 항상 바람이 분다. 그래요, 맞아요. 꼭 그렇게 속삭이는 바람이 분다. 거기가 어디든.
이 이야기- 토요일 오후에 겨우 두 시간 산책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길게 쓴 까닭이 바로 여기 때문이다.
"나는 내 장례식을 내가 다 장식할 생각이야. 영정 사진도 내가 골라 놓고 절대 절하지 말라고 미리 써놓을 거야. 하이, 그래도 좋고 잠시 얼굴 좀 보자고 그럴 거야. 살면서 제대로 본 적 별로 없으니까 잠시만 그대로 서서 보자고 그럴 거야."
"3일 동안 음악을 틀어놓을 거야. 그것도 CD 세 개쯤 미리 준비해 놓고 돌아가면서 틀어달라고 해야지. 그리고 편지도 써놓고 우리가 걸었던 이야기 같은 것은 몇 개쯤 직접 읽으면서 녹음할 거야."
"다들 3행시를 하나씩 적으라고 그러면 어떨까? 4행시로 할까, 강물처럼, 이렇게?"
아내도 이제 제법 고수가 됐다. 우울해하는 기색 없이 상주한테 절할 때는 깨금발로 하라고 그러고요! 그런다. 깨금발이란 말을 알아들을까. 벼랑박 하면 못 알아듣던데. 둘이 철없이 웃다가 아내가 한마디 덧붙였다. 대신 그런 것도 다 때가 돼야 한다며, 너무 일찍 죽으면 안 된다고 못을 박는다. 나는 그거야말로 억지라고 타이른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일인데 하늘에 매달려 빌어야 할 것을 사람한테 재촉하면 쓰겠냐며 옷을 털고 일어섰다.
정말이지, 그러고 싶고 그럴 생각이다. 마치 출판 기념회처럼 꾸며도 좋을 것 같다. 아니면 낭송회 같은 것도 좋고 조그마한 음악회는 또 어떨까 싶다. 한동안 빵이 배우고 싶어서 새벽잠을 쫓아가며 배우러 다녔었는데 그것도 다시 시작해 볼까. 빵을 만들어서 선물하는 장례, 그런 이별은 또 어떨까.
그때까지 나는 책을 쓸 수 있을까. 책을 쓰면 거기에 사람들 이름을 하나씩 적고 그 사람들과 나눴던 에피소드를 몇 줄 적어볼까. 술 적게 마시라느니, 담배 끊으라느니, 아직도 경마하냐고 그러지 말고 시詩 한 편 잘 적어볼까. 하긴 여전히 시를 읽지 않을 텐데, 그것도···· 참 미안하고 성가신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또 생각한다. 레퀴엠을 듣기로 하고 미안하지만 나만 듣기로 하고 가만 앉았다가 일어서기로 한다. 아무것도 없기로 한다. 사진도 시도 배경도 다 없기로 한다. 홀가분해서 좋기로 한다. 심심한 것이 나쁘지 않다고 한다.
쿵작작 딴따라라 따라라, 익숙한 멜로디가 사람 어깨에 손을 얹는다. 길이 끝나가고 있다. 첼로의 길고 장중한 음처럼 여기부터는 한길로 따라간다. 길이 끝나면 사위는 금새 어두워질 것이다. 그러기 전에 여기 갈래길에서 2001년 영화에 나왔던 쇼트타코비치 왈츠 2번을 듣는다. 눈이 예뻤던 사람들을 따라한다.
"혹시, 왈츠 출 줄 알아요?"
"저, 요즘 교양체육 시간에 배우거든요."
"······."
"남자는 왼발이 앞으로 나오고요, 여자는 오른발이 뒤로 나가는거예요."
"자, 해봐요, 시작! 하나, 옆으로···· 뒤로요. 하나, 둘, 셋. 흠음음음 음음음."
가만 있을 수 없어서 손을 잡는 시늉을 하고 왈츠를 추는 것처럼 발을 옮겼다. 딴따라라 따라라라라,라라라.
7시 03분,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멀리 지평선 너머로 해가 내리고 있었다. 정면을 길게 늘어뜨리고 사진을 찍었다. 휴대폰이 좋으니까 카메라 사고 싶은 것도 매번 잊어버린다. 아내가 국밥 먹으러 가자고 그런다. 가자, 배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