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마실길 1, 2코스 - 2020.0401
우리가 걸으면서 나눈
어디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마실길, 마실이라는 말은 엄마나 아빠한테는 익숙한데 너희 둘에게는 낯설겠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을 거야. 아마 엄마는 그랬을 거야, 내가 그랬으니까. 요즘 가게 이름에 '마실'이란 말이 간혹 보이는 것을 너희는 알까? 마실 간다고 그랬다. 옆집에 옆 동네에 놀러 가는 것을 다들 그렇게 말했거든, 마실 간다고.
부안에서 격포를 지나가는 이 길을 만들면서 사람들이 그 추억을 꺼냈던 거 같다. 마실 갔다가 돌아오던 달밤, 마실 가는 흥겨움, 가벼움, 반가움 같은 것들을 떠올렸을 거야. 어떤 기억은 사람을 그 시절로 몰아가는 힘이 있거든. 양 떼들 알지? 목동이 몰고 다니는 양 떼들, 그런 기억들이 사람들에게는 있어. 스스로 양 떼가 되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싶은, 따라다니고 싶은 기억들. 우리는 마실길을 걷기로 했다. 아직 바람이 차가운 달, 그렇지만 시작하는 3월에.
예술이어도 좋고 낙서라도 좋을 시간이었다고 쓴다. 빨리 걷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고 쓴다. 그것이 더 좋았다고도 써놓을 테니 나중에라도 '꼭 그런 것은 아니었잖아!' 그러면서 따지러 왔으면 좋겠다. 그때 내가 다 갚아줄게. 우리가 걸었던 모든 걸음에 값을 치르기로 하자. 그 시간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바다와 하늘과 섬이 온통 하늘색이었던 날을 우리는 그때에도 기억할 수 있을까. 그때에도 천천히 이야기해 줄 자신이 있다. 가능한 천천히 걷고 싶었다고. 2코스가 다 끝나갈 때는 힘들었어도 아쉬운 것도 컸다고. 계속 우리 네 사람이 거기 돌아다니는 환상 같은 것이 있었다고 말해줄 것이다.
4학년 강이는 엄마 어깨까지 키가 자랐다. 그 옆으로 매는 가방은 누가 만들어줬냐. 거기 앞에 달려 있는 고양이는 너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구나. 너는 어디에서 그렇게 앞니를 예쁘게 내밀고 사진 찍을 줄 알았는지, 눈하고 입이 같이 웃는 너를 보면서 나도 믿는다. 웃음이 기적이라는 말을.
중학생이 된 산이는 엄마 귀밑에 머리가 닿는다. 너희는 엄마가 늘 뒤에서 그렇게 눈금이 되는구나. 세 사람의 표정이 휴대폰 카메라에 그대로 들어온다. 천연색이란 색은 지금 아닐까. 왼쪽 다리를 살짝 구부려 짝다리를 짚고 허리춤에 왼손을 갖다 붙인 그 포즈가 보기 좋다. 바람이 화음을 넣어 노래 부르는 듯 차갑고 시원하고 상쾌하게 부는 지금이라는 저 색깔이 마음에 든다. 세상이 우리를 따라 빙그르르 돌아가는 것인지, 우리가 세상을 도는 것인지 희미해졌다. 여기 나오니까 바다와 하늘이 하나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저 끝까지 자꾸 시선이 간다. 선을 긋고 살아야 한다면 수평선을 닮은 선이기를. 정확하다고 올바른 것은 아니니까, 올바른 선 하나를 긋는 데도 하늘은 바다가, 바다는 하늘이 필요하구나. 우리들 안쪽으로는 지평선이 우리들 밖으로는 수평선이 올바르게 서 있다. 하늘과 땅이 긋고 하늘과 바다가 긋는 저 바른 선을 향해서 우리는 걷는다.
나도 할아버지의 시계처럼 할아버지가 되고 시계도 하나 걸어놓고 살까. 너희 다음에 또 너희와 닮은 다른 너희들이 옛날이야기 하나 들려달라면 오르골에서 흘러나오는 할아버지의 시계를 먼저 들려주어야겠다. 옛날에 이 오르골 소리처럼 그렇게 좋은 날이 있었어, 너희들처럼 귀여웠던 아이들이 바닷가를 걸었지. 그것이 시작이었다. 내가 아는 옛날이야기는 그날 시작했거든.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고 여전히 계속 돌고 있지. 길에서 길로, 계절에서 계절로, 나에게서 너희에게로.
산이와 강이에게.
마실길에 다녀온 지 벌써 사흘이나 지났다. 둘 다 몸은 어떤지 모르겠다. 아빠도 어제까지 시시때때로 피곤해서 힘들더니 오늘은 한결 가벼워졌구나. 이번에 걷고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입버릇처럼 산티아고에 가야겠다고 그랬었는데 그게 생각같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받아들였다. 몸이 따라 주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가고 싶다고 외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이렇게 깨닫다니, 아빠도 한참 멀었다. 그렇지?
사람은 흥미로운 존재인 거 같아. 정말 잘 잊어버리고 산다. 자신의 처지를 잊고서 좋았던 때만 기억하고 걷다니····. 그런데 그래서 힘들 때도 있지만 무사히 잘 지나오면 통쾌하잖아. 어떤 것은 잊고 어떤 것은 기억하는 우리들 시스템이 재미있는 거 같아. 너희는 어떤 것을 놓아주고 어떤 것을 남겨놓을까. 그리움이란 말은 언제쯤 알게 될까. 아빠도 엄마도 이렇게 시원하게 걸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싶었다. 그동안 병원에 다니고 누워 지내고 이래저래 많이 무거웠었는데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 같다. 창문을 다 열어 놓고 집 청소를 싹싹 해버린 거 있지, 그 기분이야.
잘 기억하면 그게 희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일을 잘 보관했다가 꺼내는 일, 그게 우리에게 필요했었던 거야. 그러니까 서로 마음이 통했던 것이고. 마음이 통하니까 잘 걸었잖아. 날씨도 좋았고. 사람에게는 희망이 필요해. 그래, 그래, 그래, 그래.
아빠는 그렇게 희망을 봤으면서도 욕심을 내는 것이 아직 수준이 미달이야, 앞으로 기본부터 새로 배워야 할 거 같다.
속이 편한 만큼만 먹어야 하는데 먹고 싶은 만큼 먹고 배가 아프다고 그러잖아. 그건 실수야, 실수를 반복하면 더 이상 실수가 아니지. 내가 오늘 새로 쓴 희망은 이런 거다.
'진짜 희망은 안과 밖이 편안한 것'
수고가 수고롭지 않고 다정하게 보일 때 편안함이 묻어나는데 그 순간 희망이 막 기지개를 켠다는 것을 알겠어. 삶이 좋아하는 것이 바로 희망이지, 희망이 생기면 사람이 달라지거든, 삶은 사람의 스토리잖아. 스토리에 생기가 돋는 것이지.
우리는 더 잘하려고 애쓰지 말자. 애쓰려고 또 애쓰지 말고 더 편한 것도 적당히 거리를 두자. 얼마 전에 그런 말 들었거든. 사랑할 것을 사용하고, 사용할 것을 사랑한다고. 그 있잖아, 돈! 돈은 사용해야 하는데 사랑한다고.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인데 마구 사용하고 버린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렇지, 그 말이 맞지.
사용하지 말고 사랑하는 그 말을 더 넓게 펼쳐놓고 거기에 담아보는 거야. 지도에는 세상이 다 들어가 있잖아. 그렇게.
볕이며 꽃, 길이며 물, 너희들 걸음 하나하나도. 그것들을 지도에 그려 넣고 세상을 다니는 것이지. 그렇게 사는 것처럼 살아보기로 우리의 희망을 삼는 것은 어떨까. 없어서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즐기지 못하는 것을 살피며 사는 거야. 시간을 죽게 내버려 두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살리는 거야. 우리가 살린 시간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꽤 근사하잖아.
너희와 함께 걸었던 길을 어떻게 1코스, 2코스 그렇게 부르겠니, 어떻게 그것을 한마디로 부를 수 있을까. 아빠는 그게 작품 같았다. 하얀 민들레 신기했지? 노란 꽃만 봤었는데 하얀 꽃이 예쁘더라. 우리가 걸었던 마실길에는 상사화도 많이 피어난대잖아. 노란 상사화란 말을 듣고 믿어지지 않았다. 그 꽃을 볼 수 있을까? 상사화가 언제쯤 잘 피는지 적어놓고 기억하기로 하자.
고사포 해수욕장에 다 올 즈음에 우리 모두 힘들었잖아. 아빠도 신발이 꽉 끼더라도. 발이 부었던 거 같아. 그날 그렇게 4시간 넘게 걸었어. 정말 수고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편안하던지, 아직도 그 느낌이 사람을 포근하게 하는 거 아는지 모르겠다. 시간 같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에 서 있다는 느낌이 서늘하게 불어오더라고. 고사포 솔숲에 부는 바람은 아이스크림보다 백 배 더 좋았어.
영국인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코츠월드는 다른 풍경, 다른 시대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래. 양 떼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이라는데 거기도 우리가 방문할 수 있을까. 이 길을 따라 계속 걸으면 거기도 갈 수 있을까. 길은 어디까지 얼마나 많이 있는 거야, 이거 참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맛있는 베이커리 빵이구나. 완벽한 여행으로 우리 속도를 내어볼까.
매일 같은 생활을 해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라며 밖에 나오니까 좋다고 엄마는 내내 잘 걷더라. 가장 태연하더라.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회사에 잘 다녀오더라. 엄마가 제일 건강한가 봐? 그거 알았으면 좋겠다. 엄마가 건강하고 아빠가 잘 걸었던 것도 모두 너희들 덕분이라는 것. 너희에게서 애정을 볼 수 있었다. 아빠하고 엄마한테 보여주는 애정뿐만 아니라 길에게도 전하는 마음을 볼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산이가 엄마 배낭을 대신 메고 가겠다고 나서고 강이가 엄마 몰래 사진 찍어주고·····.
하늘색 꽃이 달린 꽃들이 땅에 가깝게 피어난 풀밭을 지나면서 발자국 소리를 들었을 거야. 온갖 풀들이 들었을 거야. 나도 듣고 엄마도 듣고 너희도 듣고 시간도 그 소리를 들으면서 지나갔을 거야.
엄마는 아주 대담하게 이번 기회를 살려 더 걷자고 나선다. 그래도 될까? 그래도 괜찮겠어? 다음 코스는 성천에서 격포항까지 마실길 중에서 가장 긴 거리다. 적벽강에서 찍는 사진은 말할 것도 없이 멋질 것이고, 격포항에서 맛있는 것도 먹자. 기분 내키면 위도에 배 타고 다녀올까. 이래저래 재미있는 일들뿐이다.
아, 맞다. 마실길에는 그늘이 없더라. 챙이 넓은 모자를 써도 볕이 뜨거운 날에는 견디기 힘들 거야. 그래도 마실길은 걸어봐야 할 길이 된 거 같다. 우리 남은 6개 코스도 선물처럼 걸어보자. 어때, 젊은 그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