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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un 08. 2024

지리산 둘레길 : 오미 - 난동 2

우리가 걸으면 나눈


밥 짓는 장면이 평화로워야 밥 먹을 때 다정한 말들이 오가고 밥 먹고 나서 편안하다. 그래서 토대가 되는 것들은 신중하게 고르고 다져야 한다. 시작도 중요하고 그다음도 역시 중요하다. 사는 데 한시도 중요하지 않은 때가 없다. 무너지는 것은 정말이지, 한순간이니까. 그 순간들을 어떻게 쌓아갈 것인지, 삶이 묻는다. 언제나 그다음을 물어오는 삶에게 아무 할 말이 없을 때, 말이 나오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지친 것이다. 우리가 지쳐 쓰러져도 삶은 계속된다. 나 없이 내 시간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절망의 얼굴이다. 그래서 나는 뛰지도 쉬지도 않는다. 다만 걷기로 한다. 무엇을 하든 걷고 있으면 삶이 물어오는 질문에 어떤 말이라도 해줄 수 있으니까. 묻고 답하는 것이야말로 삶이니까. 그것만 잘하면 되니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지 말자. 삶은 어려운 것을 묻지 않는다. 둘레길에 서 있는 벅수를 볼 때마다 삶이 저렇다고 생각한다. 날개를 펴서 양쪽 길을 가리킨다. 가리키는 것이 질문이면서 동시에 답이다. 질문은 단순하고 답은 저마다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삶이 펼치는 퍼포먼스다. 벅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길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 있다. 우주는 길이고 삶은 묻고 나는 하나의 순간이다.

용호정을 지나서 구례 군민 체육시설 앞에 도착했다. 그늘 없이 걸어왔다. 날이 좋았다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 흐려서 좋은 날이다. 글쎄, 밥을 뭐 먹으러 갈까. 점심 먹을 시간에 정확히 맞춘 듯하다. 주변에 건물들이 보이고 공원에 나와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맨날 국밥만 사는 것 같아서 먼저 말을 꺼냈다. 저기 숯불갈비 있네, 얘들도 없으니까 맛있는 거 먹자고 꼬셨다. 낮에 고기 먹는 것이 별로였는지 아니면 비싼 물가 때문에 선뜻 내키지 않았는지 아내는 다른 것 먹자고 그런다. (생각해 보면 그래도 한 번 더 권했어야 했다. 부부는 그러냐고 쉽게 수긍하고 얼른 다른 데를 찾는다. 만만한 거, 국밥 같은 거 말이다.) 건너편에 딱 좋은 간판이 보였다. 지리산 밥상. 지리산 밥집 그랬으면 주저했을지도 모른다. '밥상' 그러니까 솔깃해지고 결정이 쉬웠다. 저기!

글을 자주 쓰다 보니까 몇 번 '식당운'에 대해서도 언급했었는데 확실히 선견지명이 있다. 그날도 운이 좋았다. 우스개로 일부러 '특' 시켰다며 많이 먹으라고 아내에게 권했다. 고생했으니까 지리산 특 정식 드시지요. 식탁에 차려진 찬들이 맛깔스러웠다. 배고프니까 뭐든 맛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반찬이 골고루 맛있었다. 나그네라서 좋은 것 중에 하나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밥을 먹어보는 재미다. 함부로 품평을 하지는 않겠지만 맛만큼 다른 것이 있을까. 내 마음속에는 맛 지도라는 것이 업로드되고 있다. 맛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맞다. 지리산 밥상, 둘이서 만족했다.

그다음이 중요하다. 밥을 먹기 전보다 밥을 먹을 때가 중요하고 밥을 먹을 때보다 밥을 먹고 나서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모든 예술가며 성인들이 허투루 매 순간이 중요하다고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점심 먹고 다시 우리가 걷던 코스로 돌아왔다. 새로 길을 다듬은 흔적이 보였다. 넓지도 좁지도 않게 오솔길이 정비되어 있다. 벚나무도 간격이 좋게 즐비해서 그늘도 자연스럽다. 저쪽 가외는 맨발로 걸을 수 있게 황토를 깔았구나. 시시껄렁한 농담이 시작됐다. 어떻게 맨발을 벗나? 신발을 벗어야지, 그러네 그러면서 웃었다. 웃으니까 또 생각났다. 문 닫고 나가라, 그러면 안 되지, 문 열고 나가야지! 그러면서 웃고. 그러다가 돼지와 되지로 이야기가 번졌다. 길에서는 자꾸 번져가는 것들이 생겨난다. 무엇이 번질지, 그거는 모른다. 마침 노래가 들린다. 어디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가 이렇게 절묘할 줄이야.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거기서부터 들렸다. 그리고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바보처럼 바보처럼 바보처럼. 왜 그렇게 귀에 쏙 들어오는지, 올가을에는 이 노래를 낙엽 밟으며 들어야겠다.

황창연 신부님이 해준 유머도 꺼내 들었다. 2.5가 3한테 깍듯했대, 그런데 어느 날 2.5가 3한테 반말하고 거드름 피우더래. 3이 너 환장했냐 그러면서 달려드니까 2.5가 뭐라 그런 줄 알아? 나, 점 빼고 왔다고, 왜 불만 있냐고 그러더래. 밥이 맛있으니까 사람이 여유로워진다. 그래, 그래야 돼. 백성은 밥이 하늘인 줄 알고 임금은 백성이 하늘인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 옳은 말씀이다. 물을 보면서 걸어서 그런지 지혜로워지는 느낌이었다. 오른쪽으로 냇가에 수풀이 무성하고 물결이 잘잘잘 머리 푸는 것이 잘 보였다. 싱그럽다는 뜻일 것이다. 한 시간쯤 걷다가 길가 정자에서 멈췄다. 여기 좀 앉았다 가자고 그런다.

쉬는 날 일찍 챙기고 나왔으니 피곤하지, 시간에 쫓기지 말자고 나온 길인데 마치 내 지갑에서 시간을 꺼내주는 것처럼 인심을 썼다. 거기 누워서 잠깐 자라고 그러고 나도 신발을 벗었다. 끈을 풀다가 그만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고 말았다. 아는 사람은 안다. 꼼짝할 수 없다는 것을. 경련이 가라앉을 때까지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을 꼭 감고 기다렸다. 어차피 지금은 바로 걷지 못하니까 여기서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아내는 벌써 잠들었다. 나도 살살 졸음이 왔다. 들판에서 배낭을 베고 잠드는 맛, 사이다 같다. 숭늉 같고 식혜 같다. 노래 같기도 하고 편지 같은 것도 같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또 웃음이 났다.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감정은 순하고 연해서 쉽게 마르고 부르트고 갈라진다. 곧잘 상처 입고 피를 흘리다가 쓰러진다. 제아무리 육중한 철문 같은 몸을 가졌어도 감정이 시드는 것은 막아내질 못한다. 감정이 출렁이면 몸은 어지럽고 감정에 감기에 들면 몸은 머리를 묶고 자리에 눕는다. 감정은 꽃잎처럼 얇고 투명해서 질식한다. 어느 날 여고생에게 물었다. 감수성이란 말 알고 있냐고. 아이들 사이에서는 '갬성'이라고 그래야 알아듣고 통한다. 갬성은 알겠는데 감수성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젓는다. 그 마음이야, 싶은 것이 감수성이라고 말해줬다. 네 마음이 그랬구나 싶을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거기에 가본 적 없는 사람은 내 밖에 있는 존재를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지, 감수성이 어디만큼, 얼마나 커질 수 있을까 상상해 보라고 했다. 감수성이 커지면 나라가 사라지고 인종이 사라지고 급기야 우주가 하나의 놀이터 안에서 놀지 않겠냐고 떠들었다. 아이가 웃었다. 그러겠다며 딴 세상 같다고 그런다. 누가 오는지 알아보지 않고 급하게 문을 닫아거는 사람들에게 감수성은 오지랖으로 해석된다. 지금은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이지만 풍신風神은 원래가 사람의 외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풍신이 좋다는 것은 사람이 썩 좋아 보인다는 말이다. 감수성은 그렇게 바라보는 마음이다. 세상이 좋아 보이는 바탕이다. 올해는 프랑스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데 중요하지 않은 대목이 없다. 길 하나를 걷는 데도 필요한 것들이 조화를 이뤄야 하고 모든 선수들이 잘해야 올림픽에서도 빛나는 것이다. 조화의 틈새에는 감수성을 발라야 한다. 그래야 튼튼하고 오래간다. 배고픈 것을 알아보고 힘든 것을 받아줘야 오래간다. 나도 배고파지고 힘들 때가 있으니까. 내 감수성이 상대를 돕고 그대의 감수성이 나를 살린다. 그것이 배려가 되고 사랑이 되고 희생으로 번져가는 것이다. 전쟁 없는 세상을 원한다면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종교가 감수성을 잃어버리면 팍팍해진다. 중세가 암흑시대였던 것은 종교가 거칠었기 때문이다. 법이 거칠면 사람이 떠나고 밥이 거칠어지면 사람이 살지 못한다. 학교가 감수성을 잃으면 경쟁이 돌출하고 아이들은 날카로운 칼날이 된다. 그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 우리는 기후 문제를 바라보는 것처럼 무방비다. 낮잠을 자면서 나라를 걱정하다니, 길에서 자면 감수성도 충만해지는구나.

나도 아내도 한결 편안해졌다. 종아리도 처음보다 부드러워졌다. 절반 정도 왔으니까 걸어온 만큼 걸어가면 이 길 끝에 닿는다.

공부는 왜 하는 거 같아?

그렇지 않아도 1등을 한다는 아이에게 괜한 질문이었을까.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정말 잘하는 공부하고 그냥 잘하는 공부는 차이가 있어. 정말 공부를 잘하면 사람이 평화로워져. 그냥 잘하면 불안해. 불안한 사람은 잘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독보적인 1등이 되라는 뜻이 아니야. 나는 소설가도 아니고 작가도 아닌데 매일 글을 써. 잘한다는 것은 틈틈이 한다는 뜻도 되잖아. 내가 믿는 것은 아마 그런 거야. 좋아하는 것을 자주 들여다보는 것, 그러면 평화로워지는···· 나는 네가 평화로워졌으면 좋겠다. 아이가 그렁그렁 해졌다.

길에서 배운 것을 길에서 실천한다. 광의 면사무소 앞에서 목을 축이고 남은 6km를 걸었다. 길이 산 하나 가 없이 그대로 평지였다. 가물었는지 세심정 앞은 물이 말랐다. 시절이 좋았을 때는 여기에서도 제법 풍류를 읊었을 것이다. 세심정이란 이름도 곳곳에 많은 편이다. 국사봉, 향로봉이 우리나라 산 이름에 많다고 그러는 것처럼.

세심정 뒤로 산이 나와서 반가웠다. 그런데 3분짜리 산행이었다. 옳거니 했다가 헛웃음만 나왔다. 그만큼 걸었으면서 산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이라니, 점점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욕심이다. 꽃들이 많다 했는데 코스모스도 한 무더기 피어나고 있었다. 검붉은 양귀비부터 금계국이며 접시꽃, 베고니아, 능소화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갔으며 젊은 부부가 애완견 한 마리씩 데리고 거닐고 있었다. 나이 든 부부는 뒤를 돌아보면 우리를 쳐다봤으며 낚시를 하는 남자 둘도 있었다. 오후 4시, 6시간이 지났다. 버스가 다니는 길가에서 초롱꽃 사진을 찍는 것은 지리산 자락이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1km 남은 길이 홀가분했다. 모처럼 나에게 걸려온 전화, 산이라고 뜬다. 엄마한테만 연락하더니 어쩐 일이냐. 어디냐고 묻고 괜찮냐고 묻는다. 너도 나에게 묻는구나. 내 삶이 물어온다. 여기는 길 위다. 여전히 길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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