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떠나지는 않아도 황혼마다 돌아오면 가을이다.*
장마가 지는 날에 떠나지 못하고 떠나고 있는 나는 가을이 아니어도 가을인 것이 서운하고 반갑고 그러다가 서럽다. 늘 떠나는 너를 출렁이는 뱃전에 누워 더듬거린다. 등뼈로 수신되는 모든 것은 바늘 같다. 주파수 없이 날리는 허무가 쿡쿡 찌른다. 별이 유리조각처럼 깔린 성산포에서 지옥을 기다린다. 꿈에서 봤던 섬은 바다와 장마처럼 무심할 뿐 한 가지만 되풀이한다. 다아프다아프다아프다.
그는 있으면서 없다.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어쩌면 없었는데 이제는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리운 사람, 그리운 바다에 사는 사람이다.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죽어서 시원하라고/ 산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맑은 것들을 보면 그가 먼저 떠올랐다. 추위를 싫어했어도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건넸으면 좋았을까. 물 마시러 산에 오른다는 사람에게 바람을 꺼내주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풍경을 봤다. 그것이 여기 남았을 줄이야, 다몰랐다몰랐다몰랐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놔 두었다//
성산포에 가면 사계절이 한 번에 뜨고 진다.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살겠다는 그 시를 보듬고서 바다를 걷다가 90년, 100년을 살고 말았다는 내 말은 더 말 못 한다. 그렇게 천 년을 살아도 이름 하나 지울 수가 없는 것이 이 좁은 세상인 것을 부끄럽게 쳐다본다. 그 맑은 얼굴이 나를 부른다. 兄, 잘 있었어요?
성산포에 가면 내가 봤던 사랑에 등불을 켜야 한다. 아무도 불 밝히지 않는 거기에 불을 밝히고 이름도 불러주고 노래도 하나 흥얼거리다가 그렁그렁 울렁이는 별에게 긴 사연을 보내야 한다.
삼백육십오일/ 두고 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 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95년 12월 소주를 마시며 성산포까지 눈을 맞으며 걸었다는 이야기는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떠났다. 장마가 오고 있다.
* 김대규 - 사랑의 노래 中
* 이생진 - 그리운 바다 성산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