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라산을 걸었다. 평소처럼 오르막을 오르고 정상까지 능선을 따라 걸었다. 어깨에 걸쳐매는 가방에는 물병, 방울토마토가 들어있다. 일주일 전 복장 그대로, 같은 요일, 하늘마저도 같은 블루, 그러나 하나 바뀐 것이 있었다. 맨발이었다.
얼마 전부터 궁금했었다. 그게 그렇게 좋을까? 맨발로 걷는 것이 진짜로 그 정도야?
숲에도 여름이 가득했다. 오르막에서 신발과 양말을 벗어 챙겨 온 비닐 주머니에 넣었다. 휴대폰으로 세상의 모든 음악을 틀고 바짓단을 걷어올렸다. 마스크도 벗었다. 오늘 여기는 한가하다. 새들도 조용한 오전 10시, 한 손에는 신발이 든 주머니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스틱을 잡고 천천히, 새롭게 걸었다. 이게 그렇다는 말이지?
발바닥으로 모든 것이 집중되었다. 여태 앞만 보면서 걸었던 두 눈을 먼저 보직 변경시켰다. 주로 멀리 내다보며 세월을 보내던 꿀 보직에서 양쪽 엄지발가락 전방 10cm를 철통 경계하도록 임무를 주었다. 몸이 반응했다. 훈련이야, 실전이야? 여기저기서 무전이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긴장하지 마, 낯설겠지만 이상한 것은 아냐. 일단 긴장하지 않도록 달랬다. 무엇이든지 '살살' 하면 된다. 천 리나 되는 길도, 끝을 알 수 없는 사람 마음도, 심지어 폭탄 같은 것도 '살살' 다루면 다뤄진다. 그렇게 시작했다.
혹시라도 다른 것을 밟을까 온몸의 감각이 한 점으로 수렴했다. 집중했다. 거기에서 오는 긴장감이 좋았다. 평소에 느끼던 그것과 뭔가 달랐다. 말하자면 좋은 긴장감, 긍정적 긴장감이 내 등뼈 아래에서 형성되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천천히 걷던 세상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세밀함이 있었다. 초속 5센티미터, 그런 말을 어렴풋이 감각하는 것 같았다. 풍향, 풍속 같은 것을 감지해 내는 어떤 문명이 사막 한가운데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레이더 기지가 여기에 있었네? 땅이 오롯이 밟혔다. 거칠고 투박하고 날카롭고 단단하고 자글거리고 또···· 냄새날 것 같고 어디 강아지 똥이라도 있을까 싶고 특히 유리조각은 큰일이지... 싶었다. 엄살과 넉살이 햇살 아래서 닭살처럼 퍼졌다. 이러다 몸살도 날 수 있겠다. 그런데 왜 기분이 좋지?
알맞게 땀이 옷에 배어 가는 것을 걸음과 걸음 사이에서 알 수 있었다. 바람이 많지 않은 날이었지만 산길은 소슬한 기운이 감돌았다. 싸리나무 이파리가 흔들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시원했다. 아주 다른 속도였다. 차원이 다른 이동이다. 움직임을 설계하는 동작들이었다. 작은 산을 하나 오르는 데 들어간 모든 걸음이 다 달랐다. 재미가 있었다. 심심하지만 야릇하고, 조용하지만 의미 있었다. 마치 교토에서 읽었던 그 구절을 닮았다. '어제 할 수 있었던 것을 오늘 더는 할 수 없다'. 마치 마이덴 타워*에서 옮겨 적었던 그 말이었다. '날마다 채우고 날마다 비운다'. 마치 언젠가 하늘이 화면 전체를 다 차지하는 날에 내가 외워 볼 대사 같았다. 뭐라고 소리칠까. 발이 이런 것을 좋아하는구나. 처음 알게 된 것들이 생겼다.
사람이 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빨리 걸을 수도 있겠지만 내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발밑에서 바람이 일었다. 속삭였다. 혼자서 작전을 펼치는 부대를 지휘했다. 걸을수록 호기심이 더욱 왕성해지는 풍선이 발밑에서 커졌다. 대화가 되다니, 이런이런이런! 맨발로 걷는 산길에서 어쩐지 자유로웠다.
이렇게 좋은 것이었구나. 그동안에도 맨발로 걷는 사람을 한 번씩 본 적은 있었지만 그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그러는가 싶었는데.... 그럴만했다. 몇십 년을 맨발로 산길을 걷고 있다는 그 선생님의 우물같이 깊고 청량한 경험을 한 모금 얻어 마신 기분이었다.
지나간 것들 후회하지 않기. 아쉬운 것만큼 앞으로 잘하면서 살기. 지금이라도 그럴 수 있음을 다행으로 알기.
단순하고 명쾌한 문장으로 첫 기분을 또박또박 읊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좋아하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열없다. 그렇지만 그게, 그게 좋다.
집에 와서 찬물로 열을 식혔다. 모처럼 발을 물에 담그고 시간을 보냈다. 배만 만질 줄 알았지 내가 무심했구나. 그새 물이 든 구석이 있다. 자연이 만든 염료다. 내 생애 첫 문신이다. 그것도 발바닥에 말이다.
' 차카게 살자.'라는 근사한 문장이 발바닥에 새겨지는 날까지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건 어떨까.
* 튀르키예, 위스퀴다르에 있는 한때 등대였던 타워, 야경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