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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04. 2024

저 끝까지 걸어갔다 오면

비밀의 정원


밤새 온 산이 흔들렸을 것이다. 비바람 속에서 산에 사는 모든 것들은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 일찍 찾아왔던가. 미처 표정을 바꾸지도 못하고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힘이 없다. 많이 놀란 것이다. 제 살이 깎이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바라봤을 것이다. 바람은 뜯어갈 때가 있다. 받아 갈 때가 있다. 고리대금업자처럼 무서울 때가 있다. 전쟁처럼 터뜨리고 앗아가는 바람이 있다. 숲은 그 바람을 오래 기억한다. 어떤 기억은 나무도 풀도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게 만든다. 그래서 애써 잘 지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두들 잘 알고 있다. 어제 여기는 비바람이 몰아쳤다. 마치 상처를 돌보는 사람인 양 서둘러 찾아왔다. 구름이 아직 머리 위에 있었지만 그대로 비를 맞을 생각으로 달려왔다. 아무것도 손에 든 것도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묵묵히 산을 걷는 일뿐이었다. 어젯밤의 두려움을 다 들어주고 싶었다.

땅이 꺼질 듯이 물이 지나간 자리가 움푹하고 떨어지고 흩어진 것들로 길이 어지러웠다. 가만히 신을 벗었다. 애도하듯 발을 떼었다. 주변 공기가 무겁다. 인기척도 없고 새들도 없이 진공 상태에 빠진 것처럼 소리도 다른 것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음악을 켰다. 비밀의 정원,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새들은 걱정 없이, 아름다운 태양 속으로 음표가 되어 나네,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제의 일은 잊어, 누구나 조금씩은 틀려.

다른 날보다 더, 더 천천히 고요하게 걸었다. 밖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산길만 바라보며 걸었다. 어린 밤송이가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일찍 떨어진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는 것을, 그렇게 일찍 떨어진 것들을 지나갈 때 맨발인 것이 다행스러웠다. 어린 밤송이, 신이 나를 아끼시는구나 싶은 순간들을 어린 밤송이를 보면서 떠올린 것은 위선일까, 최선이었을까.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너무 오래되어서 발아를 잊어버린 씨앗 같았다. 다 말라버리고, 썩어버리고 하나나 남았을까. 장마가 진다는 소식에 더 습기 찬 구석에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껍질이 벗겨진 큰 나무를 하나 걷는 느낌이었다. 저 아래에서부터 꼭대기로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이 상처가 어떻게 될까. 무엇이 될까. 어떤 상처는 곪고 어떤 상처는 단단해진다. 상처와 나무의 나무가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나무에게서 난 상처이지만 상처가 된 이상, 그는 독립적이다. 상처로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존재가 된 것이다. 나무는 어떻게 그 상처를 바라볼까. 상처와 나무가 나누는 말을 나는 듣지 못하고 나무를 걸어간다. 저 끝까지 걸어갔다 오면 이야기도 끝나 있을까.

소설은 이 모습을 담겠구나. 상처와 나무, 거기를 오가는 개미, 맨발, 그리고 위로 같은 말들. 자연은 청소부다. 선물처럼 청소를 해놓고 누가 했는지도 모르게 꼭꼭 숨어버리는 재미있는, 쓸쓸한, 멋스러운, 하찮은, 슬픔 같은 존재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는 맨발이 어울린다. 존경을 담아서 걷는 법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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