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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01. 2024

지척

나와 나 아닌 것들의 거리


지척 / 박제영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아느냐 물으니

당신은 하늘에서 땅까지 아니냐고 물었지요

그래서 내가 아니라고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잘난 척을 좀 했지요

지척(咫尺)

지(咫)는 여덟 치, 척(尺)은 열 치

한 걸음도 채 안 되는 거리인데

지척에 두고 평생을 만나지 못하기도 하는 먼 거리가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했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마음이 받아들이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라며

잘난 척을 좀 했지요

당신은 웃으며

이렇게 물었지요

당신과 내 거리가 지척인 것은 알아요?

-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키를 못 찾고 안경을 어디에 뒀는지 몰라서 시간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가 있다. 오늘은 읽다가 접어놓은 책을 어디 뒀는지, 벌써 집안을 두 바퀴나 돌았다. 그럴 때 시간이 커다래진다. 아니 평소보다 더 쪼그매져서 잠깐 시간이 없는 시간 같아서 혼잣말이 잘 들린다. 말이 없는 편이며 가까운 듯하면서도 남처럼 냉랭한 구석이 얌전하게 방석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 시간이 나에게는 머리에서 가슴까지다. 그 거리는 세 번째 데이트를 쉽게 허락해 주지 않는 날씬한 아가씨처럼 오뚝하고 선명하고 약 오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찾기를 멈추고 내 마음을 고친다. 사라진 것이다. 사라진 것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 이것도 시간 - 시간은 적당할 때 - 이것도 시간 - 모습을 드러낸다. 늦지도 이른 것도 없이 - 이것도 - 사람만 초조하고 늙어갈 뿐, 파도만 왔다 갔을 뿐, 노을이 그 위에 내리고 있을 뿐. 그래도 안경 하나쯤은 봐줘도 좋지 않을까····

원근법을 무시한 채 멀어질수록 크고 다정하게 모양을 바꾸는 것은 인정人情이라면 가까운 것이 작고 새침하게 입을 앙 오므리고 귀띔도 않는 것은 시정時情일지도.

사람이 열이 오르면 눈이 어두워지고 귀는 적막해져 마음은 두꺼운 창을 닫고 또 닫고, 매미 소리가 시끄러워진다. 사람 속에 매미가 끓는다. 맴맴맴, 그래서는 눈앞에 있는 것도 못 보고 말지, 보고도 못 보고 말지. 그게 지척이야. 눈을 감으면 보이는데 눈을 뜨면 사라지고 없는 거리, 나와 나 아닌 것들의 거리.

일본 시모노세키를 돌아다니다 봤던 포스터, '몇 번이면 지나가고 만다, 아이의 여름'

지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냐고 나에게 묻던 그 말 앞에서 여름 햇살과 파란 하늘과 구름은 동화 같았다. 포카리스웨트를 한 모금씩 나눠주고 싶었다. 여름이면 그 색깔이 보고 싶어서 꿈틀거리는 나는 지척을 걸어가는 연습을 하는 줄도 모른다. 내가 가보고 싶은 거리, 머리에서 가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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