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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06. 2024

너의 이름은

낯선 和의 시선으로


君の名は

너의 이름은,


우리말에도 상대를 가리키는 말이 너하고 당신, 그대 세 가지가 있다. 당신의 이름은, 이렇게 써 놓으면 느낌이 달라진다. 물론 그대의 이름은, 이것 역시 제법 분위기가 있어 보인다. 너의 이름하고 당신의 이름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이 영화 재미없게 봤다에 한 표!

일본어는 거기서 더 들어간다. 상대를 가리킬 때, 아나타 あなた貴方、키미 きみ君、오마에 おまえお前、키사마 きさま貴様、오누시 おぬしお主 등의 호칭이 있다. 일본어 공부를 하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번역은 이렇듯 의미심장한 부분을 챙길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내가 하는 말이 나를 대변하기에는 한없이 모자란 언어라는 것을 시시각각 느끼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과 같다. 영화 전체적인 분위기와 스토리, 그리고 나이까지 감안한다면 역시 너의 이름으로 '君の名は' 이것이 제격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이런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말로 번역되지 못하는 장면을 발견했다. 그 장면은 번역으로 살릴 수 없는 영역이었다. 남자 주인공 '타키'의 몸으로 변한, 사실은 여자 '미츠하'가 타키의  친구들하고 장난치면서 이야기할 때,

와타시 わたし私、오레 おれ俺、보쿠 ぼく僕를 한 번씩 번갈아 사용하며 '나'를 말할 때 그랬다. 셋 다 모두 '나'라는 뜻이다. 하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그래서 결국 남자 고등학생 타키가 친구들과 평소에 사용하는 '오레おれ俺'라고 말해야 했던 장면이 나온다. 몸은 바뀌었지만 실제로는 여자 '미츠하'였기 때문에, 와타시도 아닌 아타시라고 말하는 순간 당연히 머스마 친구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던 것이다.


내 개인적인 체험이 없었다면 나 또한 그 부분을 놓치고 말았을 텐데 운이 좋았다.

언어를 공부하는 데 가장 실수하기 쉬운 것이 실수하지 않으려는 실수다. 실수에서만 얻을 수 있는 언어의 사각지대가 있다. 거기를 구경하려거든 부지런히 그리고 멋지게 실수를 해야만 한다. 주의하지 않고 떠들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아타시'라고 말할 때가 종종 있었다. 친절하게도 어느 여선생님이 웃으며 가르쳐줬다. 아타시는 여자들이 하는 말이고 '와타시'라고 해야 한다고.


잠깐이었지만 빛나던 순간이었다. 이 영화는 그만큼 섬세하다. 이제 섬세함은 어떤 애니메이션에서나 기본으로 제공되는 서비스 같은 느낌이다. 사람들의 감탄을 불러낼 정도의 정확한 묘사와 섬세한 터치는 애니메이션이 상상으로의 비행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활주로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늘로 이어지는 길이 매끄럽고 곧을수록 멋지게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너의 이름은' 끔찍할 정도로 일본을 아름답게 소개하는 이 영화는 스토리 또한 단연 최고다.  신카이마코토라는 감독을 찾아봤다. 이름이 굉장히 '만화스럽다.' 新海誠

나보다 늦게 세상에 나온 사람에게 존경이 솟는다. 작정을 하고 하루에 한 줄씩만 쓰면서 한 10년 기다리면 이 정도 나올까. 배들이 머물다 가는 항구가 떠올랐다. 그 자리에 머물고서도 세상을 다 아는 사람의 깊은 시선과 두툼한 손이 만지고 싶어졌다. 그래, 세상은 배들이 돌아다니면 된다. 그리고 아무나 항구가 되어주는 것도 아니다.


일본이나 한국, 거기다 중국까지.

인연이란 말을 이 세 나라에다가 잔뜩 풀어놓고 이어 붙이기를 하면 어떨까 싶다.

누구 능력이 되는 사람이 나서서 세 나라를 하나의 끈으로 질끈 묶어놓고 웃기고 울리기를 희망한다. 한 데 어울려 놀다 보면 서로 친해지기 마련이니까 누가 거대한 항구가 되어서 우리를 품어 주었으면 한다. 영화가 그럴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예술은 휴머니즘을 먹고 자라는 나무 같은 거라서 충분히 사람과 사람을 아우를 수 있다. 나라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더라도 사람의 마음은 감동 하나에 풀어지는 실타래에 지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좋은 작품들이 세상에 나와서 사람들 마음이 마르지 않도록 적셔주기 바랄 뿐이다.


이토모리 絲守 - 실 또는 끈이 지키는. 영화의 배경은 이토모리마을과 일본의 동경이다. 이토모리라는 말이 영화 전체를 이끈다. 한자 문화권에서 '인연' 만큼 힘이 센 말도 드물 것이다. 모든 경험치와 합리와 이성도 '인연' 앞에서는 맥없어 보인다.

운명이란 말과 쌍두마차를 이루는 막강하고도 한없이 부드러운 말 '인연'

사람은 처음부터 이 두 단어 사이를 오가며 살아야 할 존재에 불과한지 이따금 서럽단 생각도 든다. 인연을 우리는 실이라고 표현하고 거기에 익숙하다. 시작이 인 因, 다음을 따르는 연 緣이란 글자가 그럴싸하다. 인은 까닭이 되고 이유가 되는 처음이다. 처음이 풀어지는 과정을 연으로 담은 것이 인연인데, 연 緣이란 글자 하나로도 인연을 뜻한다. 彖부인 옷 단이라고 읽는다. 실이 옷이 되는 글자가 인연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스토리가 인연이다. 끝이 어딘지 모르는 여정에 부치는 편지가 품고 가는 사연이 인연이다.


일본을 和라고 쓰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순수히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和라는 깃발 아래 일본인들은 오랜 세월 살아왔다.

'너의 이름은'

이 영화는 인연을 다룬다. 우리에게는 낯선 和의 시선으로 미츠하와 타키,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 러브레터를 완성한다.


다른 사람들의 러브레터를 읽을 때에는 에티켓이 필요하다. 아무 말하지 않고 조용히 읽고 가만히 그대로 놓아두는 것. 날아가지 않게 예쁜 돌 하나 슬쩍 얹어 놓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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