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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13. 2024

가족의 색깔

나는 한 걸음씩 거기 도착하려 하네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길을 그리기 위해 나무를 그린 것인지

나무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또는 길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길과 나무는 서로에게 벽과 바닥이 되어왔네

길에 던져진 초록 그림자,

길은 잎사귀처럼 촘촘한 무늬를 갖게 되고

나무는 제 짐을 내려놓은 듯 무심하게 서 있네

그 평화를 누가 베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시간의 도끼는

때로 나무를 길 위에 쓰러뜨리나니

파르르 떨리던 잎사귀와 그림자의 비명을

여기 다 적을 수는 없겠네

그가 그린 어떤 길은 벌목의 상처를 지니고 있어

내 발길을 오래 머물게 하네

굽이치며 사라지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게 하네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지평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 까마득히 멀어지는 풍경,

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나는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 하네

- 나희덕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록

남편 슈헤이는 사별을 했다. 아들 슌야는 세상에 나오면서 엄마를 잃었다. 달리는 열차 밖으로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4학년 슌야와 스물다섯 아키라가 나란히 앉아 있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놓칠 수가 없었다.

서른 살이었다. 내가 그토록 오래 철도를 바라봤던 날은 11월 늦가을, 비가 내리던 시나가와 역이다. 그날 집에 가지 못했다. 내가 사는 곳과 일하던 곳은 전철로 1시간 넘게 떨어져 있었다. 마지막 신주쿠행 전철을 눈앞에서 놓쳤다. 놓친 것이 아니라 보기 좋게 놓아버렸다. 건너편에서부터 달려와 계단을 뛰어오르고 내렸으면서 내 앞에서 전철 문이 닫히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흔들었다.

서른두 살, 월드컵으로 일본이나 한국이 모두 뜨거웠다. 내가 일하던 곳의 관리자는 북해도가 고향이었고 그는 무수히 많은 책을 읽어댔다. 출근하면서 인사하고 퇴근할 때 얼굴 보는 정도였지만 어느 날부터 그가 내게 자기가 본 책들을 건네주기 시작했다. 책으로 이어진 인연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수채화 같은 분위기가 돈다. 봄날이었을까, 그와 내가 만났던 그 몇 년을 색으로 칠하게 된다면 나는 벚꽃의 색을 고를 것이다. 어느 선술집에서 그의 어릴 적 친구와 셋이 술을 마시다가 들었던 일본어는 내가 앞으로도 듣지 못할 최고의 문장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호네데모 히롯데 구레.'

나는 그 말을 술김에 들었고 정감의 표시로 느꼈고 그리고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바라만 보았다. 그의 이름이 잊히지 않는다. 그 이름이 나를 떠나지 않는 만큼 나는 그가 그리울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이 살면서 견뎌야 하는 통증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유골함을 가슴에 안은 적 있다. 그때 내 왼편이 다 굳어져서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던 날, 사람을 이렇게 가슴으로 안는구나. 그것을 그때 배웠다. 저것은 유골함인 거 같은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언밸런스, 풍경과 두 사람과 두 사람의 표정과 상황이 부조화를 이뤘다. 이 영화, 나를 건든다.

나희덕의 시는 물같이 잔잔해서 좋다. 그대에게 묻고 싶다. 잔잔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그것은 모양인지, 소리인지, 거기에도 색이 있는지.

영화는 가족을 그린 그림에 색을 입힌다. 영화가 끝나면 뇌 속까지 파랑 빛깔이 넘실댄다. 파랑은 활기차지만 우울하기도 해서 마치 먼저 죽은 슌야의 엄마, 나중에 죽은 슌야의 아빠, 슈헤이의 재혼한 젊은 아내 아키라, 그리고 어린 슌야, 모든 사연을 가슴에 품고 관조하듯 삶을 바라보는 슌야의 할아버지, 오쿠조노 세츠오, 모두를 닮았다. 모두 바다 같고 하늘 같았다. 할아버지와 아키라와 슌야는 바다로 이어지는 섬들이었다. 무인도, 섬만 사는 섬. 존재하기만 하고 살지 못하는 섬 3개가 나란히 손을 잡고 사람 사는 곳이 되어 간다. 파랑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배경이라면 거기 나오는 열차, 오렌지 철도 회사는 열매 같았고 해풍 같았다. 짠 바다 내음이 아니라 사람 냄새를 실어 나르는 오렌지 향기가 풍겼다. 슬픔도 웃음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에티켓을 안다. 그 짧은 순간에 찾아오는 웃음이 한 량짜리 디젤동차가 화면에 나올 때마다 쌓인다. 슌야가 웃고 아키라가 그런 슌야를 위해 기관사가 된다. 누군가, 태우고 싶은 사람을 태우고 달리는 이의 기쁨, 그것이 삶이지 않냐고 스물다섯 먹은 여자가 예순이 넘은 세츠오에게 되묻는다.

어린 슈헤이를 태우고 그렇게 달리고 싶지 않았냐고.

내가 찾은 가족의 색깔은 은은하다. 그거였다. 나는 비로소 은은한 것을 알아본다. 네 사람이 저녁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고 서로 의지하는 색깔, 머리 위로 전등 불빛이 그야말로 은은했다. 위험하지 않기를, 더 슬프지 않기를, 저녁 식사를 나누는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은 바로 그 마음이었다. 마음이 그 모양을 드러낼 때 주위를 밝힌다. 은은하게.

오렌지 철도 회사가 큰 줄거리를 맡는다. 가족이 철도 위를 달린다. 인생이 삶을 달린다. 누구를 태우고 달릴까. 누구를 태우고 싶은가. 예전에 그 노래가 있었다. 존 덴버가 불렀던 'Sunshine on my shoulder', 시냇물 소리가 잔잔하게 들릴 것 같은 노래. 그 노래 불러주고 싶었다. 내 어깨 위에 비치는 햇살이 나를 행복하게 해요. 햇살만 있어도 행복하다고 할 것 같은 표정들이 아직 따뜻하다.

만져질 것 같은 것들은 보인다. 소리가 보이고 향기가 보이고 그 느낌이 다 보인다. 보이면 어색한 것은 사라지고 가까워진다. 거기에 갈 희망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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