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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27. 2024

말할 수 없는 비밀

그해 여름, 나는 그녀와 함께


영화 이야기를 쓰기 전에 찾아본 중국어 한 글자가 있다. Xiao, 샤오. 백서른 자가 넘는 Xiao가 검색 됐다. 그 숫자만큼 자신이 멀게 느껴진다. 푸젠성 福建省 어디에 있는 위생소 卫生所라고 적어줬던 주소에도 이름은 없었다.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여겼던 것일까. 나는 늘 건성이었고 장난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안녕, 샤오샤오.

대만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보면서 두 중국 친구가 떠올랐다. 의리가 무엇인지 일깨워 줬던 항구 도시 대련 大连 출신의 왕강. 그리고 나에게 중국어를 알려줬던 샤오샤오. 오래전 그와 내가, 그녀와 내가 같은 공간에서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눴던 그 인연으로 그들의 삶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계절이 가을로 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예전 그 모습이 얼굴 한쪽에는 그대로 남아서, 나는 왕강, 나는 샤오샤오라고 웃어주기를. 저녁 바람, 저녁 공기가 날마다 가벼워지고 있다.

비밀은 말할 수 없다. 비밀 秘密이니까. 빽빽하게 들어찬 대나무밭에나 비밀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대숲을 찾아 나서는 사람은 없으면서 비밀 아닌 것을 비밀이라고 둘러 부치는 사람은 많다. 우리는 비밀다운 비밀이 없는 외로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지구 온난화라는 말처럼 헐렁하고 허랑하다. 비밀이 되지 못한 채 사람도 사랑도 우정도 거리를 헤맨다. 진짜는 비밀스럽고 진짜 아닌 것들로 허공을 채운다. 그 하늘이 바로 공허 空虛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많아야 한다. 숨기는 것이 아니라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을 살아야 한다. 우리의 비밀은 겨우 숨바꼭질이나 하는 꼬마다. 아직 첫사랑도 제대로 시작한 적 없어서 말없이 사랑할 줄 모르는, 비밀도 없는 어쩌면 비밀만 있는 흔한 이야기가 바로 우리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그런 어른들을 위한 대만 스타일의 '소나기'다. 덥다고만 하지 말고 저기까지 가서 들꽃을 한 손 가득 꺾어오는 소년의 마음이 보기 좋지 않더냐고 묻는 영화다. 소설에는 징검다리가 나오고 소나기가 나온다면 영화에는 피아노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피아노 한 대로 모든 것이 공감되는 시간과 공간이 연출된다. 그대 무엇인가에 그만큼 빠져본 적 있던가, 묻는다. 사랑하던 그때라도 그랬던가, 묻는다.

한 번 더 제목을 적는다. 말할 수 없는 비밀 不能说的秘密,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쏟아지는 초원을 오래 걷는 새벽은 얼마나 평온하고 황홀할까. 아무 걱정도 없이 그 별 같은 비밀들을 다 헤일 것만 같다.

샤오위였다. 영화에 나오는 여배우는 내가 알던 푸젠성 샤오샤오와는 다른 분위기였고 샹륜 또한 대련의 왕강하고도 달랐다. 그래도 그 음성이 반가웠다. 저 중국말을 듣는데 미소가 지어졌다. 음성과 음색, 음소, 음량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몸을 일으켜서 나를 맞이하는 이 착각을 기꺼이 환영하며 주의를 곧게 마음을 편하게 정신을 그대에게, 그대들에게 준다. 영화가 시작되면 나는 왜 이렇게 허물어지는지, 삶이 기막히게 연주된다. 바다로 둘러싸인 대만 아니던가. 금방 피아노곡이 이어지고 바다에 또 자전거에, 소녀와 소년의 희망과 절망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르면서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 하나하나에 나는 사라지고 다시 세워지고 무너졌다가 요술램프 속에 사는 지니처럼 팔짱을 끼고 불쑥 일어선다. 저 악보가 시크릿이었다. 그러니까 음악이야. 저 두 사람은 악보 안에 그려진 음표나 쉼표, 숨표가 되는 거겠지. 두 사람이 그리는 최고의 연주를 '연애'의 화풍으로 담는 거야. 샤오위는小雨 , 샹륜은湘伦 , 예술 고등학교 학생들이다. 통시적으로만 흐르던 시간이 공시적으로 확장된 무대에서 둘은 만나고 깊어진다. 물론 계기는 '비밀'이다. 아니 그 비밀 아니라 악보 '비밀'. '비밀' 때문에 서로 마주치게 되고 비밀의 나머지 음표를 두 사람이 완성한다. 완성이란 말도 사실 생각할 것이 많은 말이라는 것을 영화가 끝날 때쯤에는 저절로 알아서 아무렇지 않게 바라본다. 아무래도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이다.

요즘 나는 고시엔 甲子園에서 우승한 교토 국제고 때문에 감동을 받고 있다. 거기가 어떤 데인 줄 조금은 아는 까닭에 주체하지 못하고 감정이 흔들린다. 고마운 사람들, 멋진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며 살아가는 나다. 스물에는 후지산에 오르고 싶었고 마흔에 킬리만자로에 가고 싶었다. 예순에는 저장성 어딘가를 달리고 싶다. 물론 다시 몸이 아플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부지런히 옛날과 화해하는 일, 지금을 위로하고 돕는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은 늘 거기에서 멈췄고 그럴 수도 있었던 일들은 정말로 눈앞에 벌어졌다. 한 번만 말을 바꿔서 빌어보기로 한다. 예순에는 저장성 어딘가를 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때에도 몸이 아프고 싶다. 이것이 내 비밀이다. 아픈 채로 달리는 것, 내 삶이 그러하기를 바란다.

영화 마지막에 책상에 글자가 써진다. 역시 말 없음의 진수를 여실히 보여준다. 나 샤오위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대도 그러시나요? 我是小雨, 我爱你, 你爱我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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