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잖아도 경색된 남북 관계다. 연일 서로에 대한 비방과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위협이 어느 때보다 높다. 이런 긴장 상태는 양쪽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다. 엉뚱한 곳에서 불똥이 튀면 눈 깜짝할 사이에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평상시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실수 하나가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며칠 전 큰일 날 뻔한 일이 있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중국 여객기가 서해 북방한계선, NLL을 넘어 북한 영공으로 진입했던 사실이 있었다. 조종사와 관제탑 사이에 'right' 한마디를 서로 잘못 알아듣는 바람에 생긴 해프닝이었다. 뉴스 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여객기가 착륙을 위해 인천공항에 접근하자 관제탑은 영어로 Right, 즉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라고 지시합니다. 그런데 조종사는 Left, 왼쪽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조종사는 Left를 다섯 번 더 복창합니다. 이번에는 관제탑이 이 말을 잘못 알아듣습니다. Right, 즉 오른쪽으로 맞게 가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시속 460km로 날고 있던 여객기는 실수를 알아차렸을 때 이미 북한 영공을 날고 있었습니다. 이 여객기에 우리 승객은 21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 JTBC 뉴스
Right - 형용사 : 1. 옳은, 올바른 2. (틀리지 않고) 맞는, 정확한 6. 오른쪽의, 우측의
명사 : 2. 권리, 권한 6. 우회전 7. 우익, 보수주의자들
그 밖에도 다른 많은 뜻이 Right에는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사고가 일어날 뻔했던 일은 부지기수로 많다. 그 모든 경우가 사고로 이어졌다면 우리들 대다수는 이미 오래전에 파산 상태에 놓였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운명적으로도 말이다. 그래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최대한 사고를 피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들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마련해야 한다.
영화 '가을의 전설 Legends of The Fall'을 찾아 봤다. 10월에 어울리는 것들을 하나씩 해보는 기분이다. 95년, 군대 제대하고 처음으로 봤던 영화가 불현듯 보고 싶었다. 3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그 이름들이 생생했다. 얼굴을 주로 기억하는 편인데 때때로 이렇듯 사라지지 않는 이름들이 있다. 이름은 표정을 불러온다. 이름은 몸짓을 불러오고 이름은 그가 혹은 그녀가 입었던 옷을 그리고 그들이 서 있던 배경을 불러온다. 아, 기억이라니. 가을이구나.
그때는 러드로우 대령을 많이 바라보지 않았다. 트리스탄, 긴 머리의 브레드 피트에게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갔다. 저 남자를 위한 영화구나, 저 남자는 항상 멋지게 등장하네. 거기다 말도 잘 타고 생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눈빛 봐라. 몬태나의 너른 들판과 높은 산들이 모두 그를 위한 배경 같았다. 제임스 호너 James horner의 테마곡, The Ludlows 마저도 그를 위한 행진곡 같았다. 잔잔했다가 웅장했다가 사방으로 퍼졌다가 한 점으로 달려오는 그 음악이 장례식에도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30년이란 세월 때문이었을까. 어디에서든 걸음을 멈췄다. 이 소리가 들리면 거기가 가을이 되었고 나는 그들 삼 형제가 뛰노는 들판 한쪽에서 즐거워했다. 내 인생도 이 언덕에서 저 아래 시내를 바라보며 누워있기를 바랐다. 죽어도 좋을 순간들이 가끔, 아주 가끔 어쩌다 한 번 찾아온다. 내가 꿈꾸었던 것은 가을이었을까, 전설이었을까. 일요일 밤, 감상에 푹 잠겼다. 깊이 빠져들었다.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대로 머물고 싶었다. 러드로우 대령, 맏아들 알프레드, 트리스탄, 밝았던 새뮤얼 그리고 어떤 옷보다도 하얀 옷이 눈부셨던 수잔나, 그들이 떠드는 달콤한 이야기들을 오래 듣고 싶었다.
요즘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책에 나온 문장들과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리는 무늬가 하모니를 이루며 나를 감싼다. 맛 좀 보시겠습니까?
「이념은 원심력이 있습니다. 이념은 계속 높아지고 높아져요. 그러니까 순수를 지향해요. 선명성 경쟁은 여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순교자적 경지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누가 더 순수한가? 누가 더 맹목적인가? 누가 더 철저한가? 이념은, 믿음은, 신념은, 즉 믿음의 대상은 원심력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이것은 인간의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높아지려 합니다. 멀어지고 높아질수록 진짜같이 보여요. 그래서 누가 더 저 먼 곳까지 도달하는가? 이것만 사명으로 남기 때문에 광신도가 나와요. 맹목적 수호자들이 나오죠. 그렇게 이념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자기하고는 거리가 멀어지지요. 자기의 구체적인 삶하고는 아주 먼 거리에 있을 수밖에 없어요.」 최진석, 인간의 그리는 무늬 109p.
인디언 할아버지 원스텝의 목소리로 영화가 시작된다.
「어떤 이는 크고 분명한 내면의 소리를 듣고, 들리는 그대로 살아간다. 그런 사람은 미치거나 아니면 전설이 된다.」
막내 새뮤얼이 약혼녀 수잔나를 데리고 몬태나 러드로우 대령의 집에 온 날, 큰형 알프레드도 둘째 트리스탄도 모두 한마음이 된다. 눈빛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터무니없이 빛났다. 30년 전에는 알지 못했는데 러드로우 대령은 혹시 아들들의 설렘을 눈치챘을까 싶어서 화면 바깥쪽에 있는 앤서니 홉킨스마저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누구나 인정하는 그의 명품 연기 아닌가. 숨 쉬고 내뿜는 담배 연기까지도 자기의 페르소나처럼 다루는 사람들이 몇인가 있다.
1차 대전이 나고 새무얼이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나서면서 세 사람의 운명은 소용돌이친다. 눈앞에서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본 트리스탄의 자책감, 트리스탄을 사랑하는 수잔나, 그 둘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알프레드. 모두의 집이 되어주었던 러드로우 대령. 나는 비로소 러드로우 대령을 알아보는 시선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인디언 억압 정책에 반대하고 몬태나에서 살아가는 퇴역 군인. 몬태나의 풍경은 얼마나 근사했던가. 혹독한 겨울도 아마 그 가을날 풍경 때문에 견뎌냈을 것이다. 겨울로 가는 길목은 여기서나 거기서나 지금이나 그때나 한결같이 꿈속 같다.
「난 원칙을 따르며 살아왔지, 인간과 신의······ 그리고 넌 어떤 것도 따르지 않았지. 그런데도 모두 다 너를 더 사랑했어.」 알프레드가 트리스탄에게 했던 말은 너무나 익숙한 말이었다. 술자리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자주 했던 말 아니었던가.
수잔나는 스스로 생을 끝낸다. 한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영혼이 있다. 어쩌면 영혼이란 것이 사랑하는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녀의 말은 사람을 울리고 가을을 다 헤집고 돌아다닐 것만 같다.
「나는 그녀가 죽기를 바랐어요. 어쩌면 새뮤얼이 죽기를 바랐는지도 몰라요.」
영화가 나오고 그 후에 시간이 지나서 들었던 이야기다. 사실은 가을이 아니었다고, Legends of The Fall은 가을의 전설이 아니라, Fall - 명사 : 7. 멸망, 몰락. 이었다는·····
가을은 그런 계절이다. 쓰러지고 떨어지고 어딘가에 빠지는 때다. 그래서 가을 그러면 속에서 바람이 부는가 보다. 휘파람이라도 불면서 가을은 잘 받아들이기로 한다. 사고가 나지 않게 잘 받아내기로 한다.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게 가을에는 조금 멋을 부렸으면 한다. 어떤 말은 잘못 알아들어도 더 멋진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