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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18. 2024

애인 艾人

맨발로 말이다


휴대폰이 울렸다. 지난주에 연락이 없던 우진이 아빠다. 다른 때 같으면 아이코 안녕하십니까, 너스레를 떨면서 전화를 받았을 텐데 잠시, 아주 잠깐 망설였다. 사실 어제 구례, 지리산 둘레길 20코스를 걷고 돌아온 참이다. 그 뜨거웠던 땡볕 아래 2만 8천 걸음을 고갯길에 하나씩 찍고 오르지 않았던가. 이름 모를 숲길과 임도, 도로와 들판을 걸으면서 마치 독립운동하듯 씩씩하게 걷지 않았던가.

농담 삼아, 우진이 아빠를 애인艾人*이라고 부른다. 쑥이란 글자를 잘 쓰지 않아서 하나 기억해 둘 요량으로 언젠가 점심을 먹으면서 쑥 같은 사람, 향기도 좋고 건강에도 좋고 또 해마다 잘 살아나고! 건넸던 말이 그대로 호칭이 됐다.

물론 상대방이 싫어하지 않으니까, 그것도 써먹을 수 있는 것이다. 애인은 혼자만 좋다고 되는 그런 것이 아닌 것을 삼척동자도 아니까.

전화를 받고, 그는 늘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다. 여느 때처럼, '히사시부리' 그러고 시작하는 우리들. 역시 애인끼리는 암호가 있어야 한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아예 양말을 신지 않았다. 둘레길에 비하면 함라산은 식은 죽 먹기다. 물론 피곤하지만, 아직 발바닥이며 종아리가 아프기도 하지만 그러면 어떠냐 싶은 나, 나는 고집스럽다. 조금 미련하기로 하자. 맨발 걷기에 대해서 쓰고 있으니까, 이번 일요일은 이렇게 걷고서 쓴 이야기를 게시하면 되겠다.

신발도 슬리퍼로, 얼음물을 하나 준비하고 우진이 아빠가 좋아할 만한 간식이 마침 없다. 애들 먹는 과자를 하나 대충 가방에 넣고 나섰다. 그는 - 애인은 - 벌써 와서 기다린다. 치즈 케이크를 한 조각 건넨다. 지난주에 캐리비안베이에 놀러 가느라 연락을 못했다며 편의점 커피도 같이 준다. 별로 당기지는 않았지만 맛있다고 - 오, 맛있다! 이런 거 - 두 번쯤 말했다. 한 번은 작게, 두 번째는 좀 크게, 바로 커피도 스트롱을 콕 찔러서 입을 가능한 뾰족하게 내밀고 살짝, 조금만 들이켰다. 꿀꺽 소리가 나려는 것을 숨을 멈추고 소리를 제거시켰다. 아 달다, 그렇게 말했다. '다'를 조금 울리게, 다아~.

손가방에 슬리퍼를 넣고 맨발로 산을 올랐다. 어제 걸었던 탓에 발바닥이 아플 것 같았는데 오히려 마사지를 받는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었다. 괜찮네? 볕은 여전히 뜨겁다. 금방 우진이 아빠 머리에서 땀이 솟는다. 목덜미를 타고 티셔츠를 적시는 것이 선명하다. 사람이 여름을 나는 모습은 소라가 이사를 가느라 껍질을 이고 뒤뚱거리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물론 그 모습을 본 적 없지만, 세상을 몸에 이고 계절을 온몸으로 지고 가는 모습이 꼭 그럴 것 같았다. 우리, 이사 가는 거 같아요. 그는 영문도 모르고 힐끔 나를 보더니, 안세영 이야기를 꺼낸다. 배드민턴 협회장이 그만둬야지, 그게 뭐냐며 협찬 이야기도 막 해댔다. 그런 거 많아요, 내 대답은 언제나 조금 성의 없고 서늘하고 재미없다. 자그마한 회사도 학교도 아파트도 사람들 모이는 데는 이익 관계라는 것이 있어서 그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정확히 하면 정확히 해서 문제가 되고 누군가를 봐주면 봐줘서 탈이 나고, 또 한 번 봐주고 나면 다음에도 기대를 하고, 그러다가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사이가 틀어지지요, 사이만 틀어지나? 그때부터는 쫓아내려고 덤벼들지, 버티려고 하지, 막 하는 것이 어디 한둘이어야지요.

분노였다. 아니, 우리가 분노했다는 것이 아니라 산에 오르면서 우리가 주로 다뤘던 주제는 '분노'였다. 정치가 빠질 수 없고 독립이며 독립운동이 등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분노의 힘으로 돌아가는 슬프고도 긍정적인 장치들도 한 번쯤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이 맨발로 가능하구나. 나는 이야기 끝에 그래서 우리가 맨발을 잊으면 안 되겠다고 거들었다. 나부터 자꾸 편하려고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종교가 없는 우진이 아빠한테 예수님 이야기도 꺼냈다. 마침 3일 쉰다는 그에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멜 깁슨 감독이 만든 영화를 권했다. 예수님은 맨발로 잘 걸었다며 죄는 무엇이고 그 죄는 누가 누구에게 짓는 것인지 지금쯤 물어볼 때가 됐다고 했다. 우진이 아빠는 인문학적인 상태에 들어섰다. 질문을 찾고 질문이 많아졌다. 오늘도 나는 그에게서 '소나기'에 대해서 말하다가 사람이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깊어지고 말았다. 맨발로 말이다.

함라산 정상에는 벤치가 몇 개 있다. 시원하게 물을 마시고 땀을 식혔다. 모든 게 질문으로 들리고 보이기 시작한 그가 무슨 말을 또 물을까 싶어 과자도 먹으라고 내주고 물도 더 마시라고 권했다. 나는 잘 지친다고 슬쩍 눈도 감았다. 바람이 분다. 아, 이만한 유혹이 있을까. 나는 바람 부는 곳에서 바람을 찾으러 다니는 바람잡이다.

어쩌다가 우리는 내려오면서 '가난'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을까. 흥이 났던지 그가 일본어로 이야기하면서 내려가겠다고 나섰다. 군대 가기 전에 부산에서 익산 오는 도둑 기차를 탔던 이야기였다. 전에도 들었던 적이 있어서 심드렁하게 듣고 있는데 그는 아슬아슬해하며 땀까지 훔쳐 가면서 그때 그 기차 칸에 타고 있었다. 사람이 인문학에 빠지면 이야기를 저렇게 한다. 유시민이 그렇고 최재천이 그렇다. 또 많지, 그렇게 살 떨리게 말할 줄 아는 사람들...

도둑 기차가 끝나더니 이번에는 엄마가 가끔 자기를 태우고 기차도 타고 버스도 탔는데, 이랬다고 그런다. 만약에 기차 타는 사람들이 많거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 사람들 틈에 슬쩍 등을 떠밀어 먼저 타라고 손짓을 보내셨단다. 애들은 차가 도착하면 좋아서 우르르 올라타고 벌써 저 안쪽에 자리 잡고 저희들끼리 섞인다는 것이다. 누가 누구네 아이인지 분간이 안 되고, 뒤에 이어서 타는 사람들도 많다 보니까, 차장이며 역무원들이 '아까, 탄 아이가 아줌마 아이 아니에요?' 하고 물으면 어머니는 그러셨단다. 우리 애 아닌데····. 그 모습과 그 목소리가 다 들리더란다. 뒤에 앉아서도 그게 보이더란다.

그 어머니가 암에 걸렸고 지금은 걷지 못하실 정도라며 안타까워하셨다. 역으로 통하는 지하보도에 물이 차면 거기를 리어카로 태어주면서 백 원씩 받고 그랬어요. 시간 맞춰서 기차 타러 왔다가 못 지나가게 생겼으면 낭패잖아요. 나도 그 리어카 몇 번 탔던 기억이 있다며 옛날을 회상한다. 우리 어머니는 그 백 원 아낀다고 빙 돌아서 집에 왔어요. 그렇게 사신 분이신데···· 말줄임표가 많아지는 대화는 건질 것이 많은 대화다. 역시 행간行間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말은 진실임에 틀림없다. 맨발은 어쩌면 그런 행간이 아닐까.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일상 사이, 사람과 운명 사이에 나부끼는 옷자락 같은 거. 노스탤지어라는 거. 情 같은 거, 그런 거 아닐까.


산을 다 내려와서 오늘은 뜨겁게 '추어탕'을 먹으러 갔다. 여름 속에 가을을 담는 자세, 선비답지 않냐며 내가 꼬드겼다. 못 이기는 척 그가 식당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아무리 봐도 좋은 관계다. 같이 산에 다니며 걷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점심을 같이 먹는다. 그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서로 안다. 그의 아픈 어머니를 위해 추어탕을 포장했다. 누구의 부모든 부모를 챙기는 마음은 누구라도 기본이니까. 그가 좋아하는 것이 나를 기분 좋게 한다. 애인이 맞다.

집에 돌아와서 지금은 좀 빠르다 싶은 노래, 로드 맥퀸 Rod Mckuen의 And to Each Season을 들으면서 오른쪽 엄지발가락 아래에 박힌 가시를 바늘로 뺐다. 영화 속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 폭 익었다.


*애艾 ㅡ 쑥 : 애, 다스릴 :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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