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일요일, 6시 1분.
1일, 1분, 1요1. 1이란 숫자가 좋아 보인다. 8월 31일까지 26도가 나가는 것이 어딨냐며 어젯밤 10시에 혼잣말처럼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내일은 9월이니까 알아서 하라는 투였다. 마치 받을 빚이나 있는 것처럼 허공에 대고 다짐을 받았다. 9월은 9월 같았으면 싶으니까. 9월은 다른 영화가 걸리고 다른 길로 걷고 다른 이야기로 들어서고 싶은 시간이다. 그때부터 11월 31일 열두 시까지는 날마다 변해가는 추색秋色에 빠지고 싶은 것이다. 깊어지는 것들 사이에서, 높아지는 것들 앞에다가 '가을이니까' 미리 준비한 말을 이정표처럼 달아줄 생각이다. 여기는 '가을이니까.' 우리가 깊어지고 높아지는 곳도 '가을이니까.' 그러다가 하늘에서 차가운 것이 내리면 문득 깨달을 것이다. 떠나온 것과 떠나간 것이 '나'였다는 것을. 그 기둥에 닿기 위해, '나'라고 쓰여 있는 주렴 한 글자가 펄럭이는 것을 보러 가을이 필요하다. 백 번의 낮과 밤을 계획하고서 출발하는 첫날은 지금처럼 1일 1분 1요1이 어울린다. 그래서 기분까지 좋았다. 선선해서.
22년 9월 순창.
순창 성당에는 마침 어린 시절에 함께 복사를 했었던 1년 선배가 신부님으로 계신다. 어쩐 일인지 나는 '형'이란 말이 입에 붙지 않는 아이였고 스무 살이었고 지금이다. 형, 누나, 정감 있기로 하면 그만한 이름들을 따라올 만한 것도 드물 텐데···· 사람을 부르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이름도 자기 자신도 어색해한다. 그런 사람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거라니, 삶은 때때로 지도에 그려지지 않은 길로 사람을 이끈다. 아마 '형'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있었다면 아이들에게 묻지 않고 찾아갔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도 나를 그렇게 부를 것이다. 어정쩡한 이름으로 들릴 듯 말 듯.
성당에 가서 인사를 드리는 것도 좋을 거 같았는데 결국 우리는 강천산 剛泉山으로 향했다. 산속에 들어서니 모든 것이 좋아서 저절로 걸음이 걸어졌다. 숲의 아침 기운이 와락 우리를 안는다. 맨발로 걸었다. 나만 신발을 벗는다. 이렇게 맨발로 걸으라고 따로 길도 만들었는데 정성을 봐서라도 걷자는데도 다들 사양한다. 나도 저 마음이 무엇인지 안다. 그럴 것까지 없다는 마음이 무엇인지 잘 안다. 이것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이다. 더 권하지 않는 것도 덕이다. 옆으로 물이 흐른다. 어떤 물이 여기 물 좋으니까 발 담그라 소리치던가. 강천산은 물이 좋은 산이다. 계곡, 폭포를 빼어놓을 수가 없다. 계절이 농익으면 단풍이 여기를 둘러싸버리면 그 경치를 찾아서 전국에서 사람이 몰려든다. 순창 한갓진 데 있는 산이지만 날마다 유명해지고 있는 산이다. 쉬다가 걷다가 구름다리까지 다 왔다.
'변하지 않는 곳에 와서야'
강천산 구름다리를 마주할 때마다 그 생각을 한다. 너는 여기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구나. 늘 처음 이 다리를 건넜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나는 몇 살이었던가. 촌스럽고 말 못 하고 꾀죄죄했던 사람이 저기 가운데 있다. 그때도 바람을 좋아했던가. 눈이라도 내리면 눈속을 헤매느라 신발이 젖고 옷이 다 얼었는데도 세상 밖으로 나올 줄 몰랐다. 바람이 속에 든 사람들은 그렇게 차가운 것들을 찾아다닌다. '변하지 않아서' 내가 너를 다시 보는구나, 나 혼자서 해후를 나눴다. 정이란 그런 것이다.
어라, 매미 울음이다. 저 소리가 어느 날 뚝 끊기는 것도 9월이다. 음악처럼 듣기로 한다. 맨발로 걷는 것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세상의 어떤 것이 좋고 나쁘기만 할까. 가을이 온다고 여름이 끝난다고 행복은 아닐 것이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날에는 그 그림자에게 말을 건다. 너는 왜 이렇게 가느다랗냐. 볕을 못 먹어서 그런다고 그림자가 까만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 나는 찡그리며 하늘을 올려다볼 것이다. 해가 벌써 저만큼 가버렸구나, 어서 남은 깨를 털고 호박도 들여놔야지. 아직은 매미가 운다. 9월에도, 9월이니까 여름도 가을도 같이 무대에 나와서 노래하고 춤추라고 그래라. 오늘 저녁에는 배산이라도 걸어야겠다. 해가 집게손가락 한 마디쯤 빨리 가라앉는다. 저도 높았다가 깊어지는 점프를 하느라 어지럽겠다. 그게 다 재미다. 그 재미로 지내면 된다. 맨발로 걷는 것도 한 때를 즐기는 내 처세법 같은 것이겠지. 등뒤에는 이렇게 써붙이자. '가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