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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왜 배워요?

Let's have a break

by 강물처럼


"때려 부수자!"

6학년 아이가 던진 것은 직구였다. 제법 묵직해서 손맛이 났다. 팡, 가죽 미트에서 경쾌한 소리가 난다. 정말? 저도 잘 들어갔다고 생각했는지 얼마쯤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맞았어요?

조금.

조금 틀렸다고 할지, 조금 맞았다고 할지 아이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그리고 웃을 준비를 했다. 1분간은 웃어도 좋은 시간이 생겼다. 아이들 모두 웃었다. 맞았냐며 웃던 아이도 눈을 더 크게 뜨고 웃었다.

휴대폰을 만질 때마다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지, 내 휴대폰은 통화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아마 말을 시키면 심하게 더듬거릴지도 모른다. 주인 닮아서 그런다고 슬쩍 뒤로 숨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천덕꾸러기는 아니다. 사실 날마다 신세를 지고 있다. 이런 식이면 큰 산 하나 정도는 훌쩍 뛰어넘고도 남을 정도다. 날마다 휴대폰에게 고마워한다. 더 이상 두꺼운 사전을 펼치지 않아도 되고 어디든 손에 들고 다닐 수 있어서 편하고 좋다. 음악도 휴대폰으로 듣고 편지도 그것으로 전하고 또 언어도 배운다.

我们吃汉堡吧, 그러면 우리 햄버거 먹자는 말이다. 저 끝에 있는 吧라는 한 글자가 가진 힘이다. 무슨 말이든 뒤에 붙어서 '그러자고' 한다. 휴대폰으로 공부하는 중국어 방에서 순위 다툼이 치열하다. 방금도 내 자리를 다른 사람이 차지했다고 알람이 떴다. 어젯밤에는 내가 두 번째였는데 자고 나니까 세 번째로 떨어졌다. 그래서 아침 시간에 부지런히 1위 자리까지 올라섰더니 2시간 만에 원상 복귀시킨 것이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할 수 있는 것치고는 흥미롭고 재미있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분발해서 또 쫓아갈 것이다.

6학년 아이가 폼 나게 던졌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이라도 감이 왔을지 모르겠다. 한 번 더 추측해 봤으면 싶다. 부수다. 고장 나다. 뭐 그런 말이 들어가 있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기본을 배우고 - 기본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 - 그다음에는 하나씩 다른 모습을 경험하는 것이 이 세상이 우리에게 바라는 삶의 모습인 듯하다. 모든 조건들이 그렇게 갖춰져 있다. 올해처럼 전혀 미동도 없다가 순식간에 모습을 바꾸는 사계절은 처음이었다. 첫눈도 폭설이었다며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다.

달리는 차를 멈추게 하는 것은 Brake, 아이에게 내가 보여준 사인은 Break였다. 우리는 투수와 포수처럼 사인을 주고받는다. 그것을 해석하고 자기 능력껏 던지는 것이다. 팡팡.

"Let's have a break."

Break에는 사전에 실린 동사만 뜻이 22개나 된다. 모든 의미를 공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뜻'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어울리게 쓸 수 있는 여유, 그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경험치를 묻거나 그것을 풍기는 것이 바로 면접이다. 말에는 수많은 시간이 지나간 흔적이 남는 법이다. 그래서 밋밋한 물살은 말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말도 거세고 거친 풍랑을 지나온 말이라야 정연해진다. 반듯하고 중심이 선다.

'부수자'는 말은 듣기 좋았다. 어감을 살렸으니까. 그대는 리듬을 볼 수 있는가. 그 리듬에 올라탄 적 있던가. 불길이며 바람, 물길, 사람의 마음에도 리듬이 있다. 어떤 리듬은 살아있어서 팔딱거린다. 내가 저녁해를 숭배하는 이유는 거기에서 농담이 있기 때문이다. 웃자고 하는 그 농담이 아니라, Gradation 말이다. 한 가지 색으로 형형색색 하는 그 신비가 사람을 황홀하게 만든다. 점점, 그 말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붉어지든지 어두워지든지 어느 쪽으로든 내가 사라지고 말 것 같아서 시선 끝에 힘을 준다. 모든 것을 담으려다 아무것도 담지 못할 것을 직감하는 그늘 - 그 말을 좋아한다, 색조 Shade of Color- 이 내게서 번진다. 감정이 넓게 그늘을 드리우면 그 안에 모여드는 작은 분위기들, 입체들, 생각들.

"영어를 배우면 쉬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 가만있어도 쉬는 시간은 정해져 있고 주어지니까, 그것이 휴식인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들처럼 쉬면 된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휴식을 위해서 투쟁한다. 요구하고 받아낸다. 다른 사람의 휴식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열심히 얻어낸다. 고장 나니까, 부서지니까. 끝나버리니까. 그러지 말라고 잠깐 멈춘다. 쉬었다 가자고 말한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다 잊었지만 서울에서 저녁 고속버스로 전주에 내려오던 어떤 날이었다. 내가 탈 버스는 다음이었는데 한 아주머니가 막 출발하려는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맨 앞에 서 있던 나에게 버스 바꾸자고 다짜고짜 표를 내밀었다. 기사 아저씨를 흘끔 봤던가, 잠시 그 까닭이 궁금했지만 화장실 때문이겠거니 여기고 그 버스에 올랐다. 승객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고 점점 버스 뒤쪽으로 자리를 찾아서 들어갔다. 그리고 알았다. 아주머니가 왜 내렸는지.

맨 뒷줄 여럿이 나란히 앉아 가는 거기 한가운데 가 비었다. 그런데 바로 옆에 그야말로 새까만 사내가 앉아 있었다. 기사님도 지체했는지 바로 출발하면서 버스 실내 등을 껐다. 다 앉지도 않았는데····. 90년대로만 기억되는 시간, 그 친구의 붉은빛이 돌던 희고 큰 눈은 여전히 생생하다. 솔직히 반가웠다. 이 자리야말로 내 자리 같아서 아주머니에게 고마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는 외국인도 드물었다. 전주까지 심심하지 않겠다 싶어서 친근감을 표시했다.

흔히들 그렇듯, 어디에서 왔냐며 상대에 대해 그리고 자기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렸다. 나이지리아 출신이었으며 한국에 산업 연수 활동의 일환으로 일하러 왔던 청년이었다. 어둠이 익숙해지면서 살짝 긴장하고 있던 그 친구의 표정도 읽을 수 있었다. 주소 하나만 들고 찾아가는, 도착해서 전화하면 회사에서 사람이 나온다고 했다는 그런 말들이 오갔다. 그런데 어딘지 이야기에 틈이 있었다. Break에는 틈이란 뜻도 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굳게 믿고 있을 때, 그때 실수가 주로 문을 두드린다. 전주행 버스에 탔으니까! 거기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잠자코 앉아 있지 않고 옆에서 떠들어대던 내가 그에게는 어떻게 보였을까. 말 많은 아시안, 동양인들은 눈이 옆으로 쫙 찢어졌다며 우리를 놀리는 서양 사람들처럼 그도 그랬을까. 너, 어디 가는지 천천히, 정확하게 말해 봐. 전주가 아니라 청주였다. 중국말은 문장으로 들으면 그 단어가 구별되지만 단어 한 글자는 의외로 구분이 어렵다. 성조가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이 잘못 알아듣기 딱 좋다. 是는 时로 들리기도 하고 试로 들려서 솔직히 눈치를 본다.

나이지리아 친구의 표정이 불안해졌다. 먼 나라,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서 밖은 깜깜하고 길은 잘못 든 것이다. 달리는 버스 안을 걸어서 기사님에게 다가갔다. 옆에 앉은 친구가 외국인인데 차를 잘못 탔다고, 방법이 없겠냐고 물었다.

거기 휴게소가 어디였는지도 모른다. 평소 집에 가면서 들렀던 곳이 아니다. 그러니까 기사님이 청주에 가는 차들을 얻어 탈 수 있는 적당한 곳을 골랐던 것 같다. 10분 휴식, break 하면서 휴게소에서 내보내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청주 가는 차를 급하게 찾는 목소리가 상냥했다. 그리고 그 친구와 헤어졌다. 청주 어디에 가냐고 묻는 아저씨 인상도 좋아 보였다. 거기 도착해서 전화하면 사람이 나오기로 했대요. 내가 마지막에 그 친구를 대신해서 해준 말이었다.

무엇인가를 배우고 산다. 어제는 바람을 맞으러 걸었다. 태백산이 생각났다. 늘 12월 마지막 날이면 그 미끄러운 길을 달려 증평으로 해서 강원도로 넘어갔던 한밤중이 생각났다. 내비게이션도 없이 사고도 나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하늘이 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바람을 배우고 싶었다. 많이 베어서 먹고 많이 깎아서 먹었다. 언어는 나를 만드는 조각칼 같아서, 바람 같아서 그 앞에 가만히 잘 서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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