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오래 집을 비워 본 적이 있으신가? / 최영숙

시의,

by 강물처럼

그대 오래 집을 비워 본 적이 있으신가? / 최영숙



멀리서 바라보는 내 집에 불빛은

아슬아슬 허공에 매달려 흔들리고

나를 기다리는 식솔에 얕은 잠이

처마 밑 모퉁이까지 나와 서성일 때

정처 없는, 갈 곳 없는 수원, 인천, 안양, 영등포

화살표 따라 주욱 미끄러져

닿지도 못하는 바다, 강

어느 낯선 하늘 밑

새벽길 골목을 뒤져 본 적 있으신가?

너무 멀리 나갔다 돌아왔는지

차려 놓은 식탁 한 덩이 밥이 뜨겁고

식구들조차 먼 나라 백성 같고

오래 비워둔 방문 열고 들어서면

그대 무너질 듯 내리 잠들지 않겠는가?

그 잠이 나를 깨워 다시 시작하지 않겠는가?


- 3월이 되면 무너질 듯 내리던 잠에서 깨어 간결하게 차려입고 나서야 한다. 보리싹이 파릇하게 돋아날 땅을 구름처럼 돌아보고 어딘가에 금빛 복수초라도 깜짝 몸을 풀고 있거든 옛다, 잘 먹고 잘 살아라며 덕담 한 마디 톡 던져준다.

정처 없어도, 오란 데 없어도 가야겠다며 나설 때에는 영 못 버텨도 열흘은 떠돌아보려고 채비를 했다는 것쯤은 알아주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다 닿아 볼 가망도 없는 어느 바다 밑이나 여울 앞 돌다리에서 바라본 얼굴, 내 얼굴에는 흰머리가 자랑처럼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도라지꽃 하냥 희어도 좋고 퍼플이랑 쪽빛이 돌아도 마냥 웃다가 웃다가.

무안하지 않도록 바람이 솔솔 할 것을 부탁하고 갯벌에 숭숭 구멍을 내어 한참 맛이 오른 낙지에 소주를 한 잔만 딱! 한 잔만.

오직 하루라도 좋으니 당신 품 안에서 봄노래 실컷, 봄으로 가는 낯선 하늘에서 만난 골목길 닮은 스물다섯의 유재하.

이상재의 클라리넷을 들어라. 봄빛에 다 녹아 너는 삶이 사랑스럽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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