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를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마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움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과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 3학년 가을학기였다.
詩를 잘 쓰고 싶다고 해서 쓸 수 있다면 누구나 시인이겠다.
그때 그 마음이 투정이었는지 부러움이었는지 아니면 치기 稚氣같은 것이었는지,
그때 창 밖에서 들리던 매미 소리는 굵은 음성이었던가 가늘어지던 비명이었던가.
여학생들은 풋풋했을 것이다.
남자들은 왜 거기서 시를 쓰겠다고 똬리를 틀고 있었을까.
'섬'
섬으로만 쓰려다 보니 섬이 과연 써질 일이었겠나.
아무도 그날 '섬'을 쓰지 못하고 서로의 앞날이 설핏 기울어진 것처럼 보였다.
섬이 되어 멀리 떨어져 앉아 머물던 그 시간은 지금도 거기 있을까.
시는 쓰지 못했고 사람들은 세월을 썼다.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는 이야기에 오늘 또 채비를 챙겼다.
설핏 또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