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목수의 손 / 정일근
태풍에 무너진 담을 세우려 목수를 불렀다. 나이가 많은 목수였다.
일이 굼떴다. 답답해서 일은 어떻게 하나 지켜보는데 그는 손으로
오래도록 나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못 하나를 박았다.
늙은 목수는 자신의 온기가 나무에 따뜻하게 전해진 다음 그 자리에
차가운 쇠못을 박았다. 그때 목수의 손이 경전처럼 읽혔다. 아하, 그래서
木手(목수) 구나. 생각해보니 나사렛의 그 사내도 목수였다. 나무는 가장
편안한 소리로 제 몸에 긴 쇠못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진 한 장이 백 마디 말을 대신할 때 우리는 고요해집니다.
내 인생도 사진 몇 장으로 다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될 수 있다면 사진 한 장이면 좋겠습니다. 거기에는 말이나 글이 머무르지 않고
순수히 어떤 모습 하나라든지 하늘이나 나무 같은 것도 괜찮겠습니다.
누군가 나를 알던 사람이 '그렇지'하며 돌아가는 길에서도 끄덕거려 줄 사진이라면 매우 고마울 것 같습니다.
한자를 쓰는 문화에서는 손 手이 사람이었습니다.
운전수도 나팔수도 손으로 자기 몫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아무것도 없는 빈손 白手(백수)는 일이 없는 사람을 말하기도 합니다.
짐승은 손이 없고 발만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가족 같이 지내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 '손. 손!' 그러는 것도 하나의 애정표현일 것입니다.
말이 없고 움직이지 않는 사물에는 자 子를 붙여 그것은 그것대로 아꼈습니다.
의자 倚子나 탁자 卓子에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글자를 쓸 때면 사람이 따듯했었던 시절이 만져지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중국에 사상가들이 많이 나왔던 까닭이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한자가 갖는 역할은 지대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이나 한자 漢字는 사람이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공통점을 가졌습니다.
생각하는 만큼 얻을 게 많습니다.
다만 아무 말 없는 것이 큰 나무 같기도 하고 하늘이나 망망한 바다와도 닮았습니다.
인간이 신의 모습을 자기 안에 담거나 경전에 쓰인 한 줄 문장이 자기 삶에 깃드는 순간에는 항상 성찰을 해왔습니다.
성찰 省察이 곧 회개 悔改가 되는 마당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나도 목수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디 가서 먼저 찬물에 몸이라도 담가야 할까 봅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목수라면 백 번이라도 물에 들어가겠습니다.
'오래도록 나무를 쓰다듬어 본' 세월이 나에게 없었습니다.
늙어갈 것만 걱정했었지, 노후대책이란 말만 머리에 들어왔었지 무엇 하나 매만져볼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많이 늦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지 않았을 때 내 손에 쇠못을 들고 땅땅 못질하던 것을 아프게 바라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