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밥상머리 4

맛이 끝내준다

by 강물처럼


병원에 다녀온 날에는 아이들에게 한껏 친절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엄마나 아빠가 없어도 흐트러지지 않고 일상을 지켜나가는 것이 기특하다.

대단한 일은 아니어도 부모를 걱정시키지 않고 자기 할 일들, 예를 들어 수학책 풀기, 피아노 연습,

시집 베껴쓰기 같은 것들을 밀리지 않고 해결해 놓는 아이들이 기본적으로 고맙다.

아이들이 그 정도만 도와줘도 집안에서 큰소리 날 일이 없다.


가능한 일찍 집에 도착하려고 노력했다.

날이 더운 탓도 있었지만 같이 점심을 먹고 싶었다.

엄마가 출근하고 없으니 내가 늦으면 저희들끼리 어설픈 점심을 먹든지 아니면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산이는 '비빔면'을 해달란다.

학년이 올라가더니 매운맛에 조금씩 길들여지는 모습이다.

아직 저학년인 딸아이는 매운맛에 약하다.

국수를 삶을까, 라면으로 만들까 잠시 고민하다가 라면으로 정했다.

나도 그렇지만 아이들이 면요리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면요리를 할 경우에는 평소에 잘 먹지 않는 야채로 균형을 잡는다.

특히 라면을 먹을 때는 더욱 신경 써서 야채를 썰어 넣는다.

볶음밥과 라면에는 오히려 음식 속에 감춰놓은 채소들로 영양이 더 풍부할 수도 있다.

친절하고 싶은 마음에 비빔면을 제대로 만든다.

우선 계란을 삶는다.

우리 아이들은 계란을 좋아하니까 한 사람당 하나꼴로 삶되 음식에는 절반만 올린다.

그래야 맛이 더 난다.

나머지 반은 면은 다 먹고 야채와 고추장만 남았을 때 따로 넣어주면 횡재한 기분이 든다.

오이도 적당히 채를 썰어 놓고 당근도 얇게 썰어 놓는다.

적양파를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그만두고 익은 김치를 물에 씻어 잘게 썬 후에 살짝 볶는다.

고명으로 올라가는 것들이다.

비빔면은 단연 고추장 소스가 가장 중요한 맛을 낸다.

산이는 라면에 딸려 나오는 소스 그대로를 비며 먹는 것을 좋아한다.

참고로 산이는 맛에 대한 감각이 좋은 편이다.

먹으면서 항상 맛의 차이를 이야기하는데 내가 들어도 정확해서 놀라는 경우가 많다.

나는 아빠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자취 생활을 많이 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된장'을 중요시한다.

무슨 음식에든 된장을 밑으로 깐다.

다만 노출 수위를 음식에 따라 다르게 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맛있게 먹지만 유독 산이는 뭔가 다른 것이 들어갔는데, 된장 맛이 조금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중얼댄다.

그때마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간다.

속으로는 '귀신같은 놈'이란 말이 내내 맴돈다.

매실진액과 된장 조금, 그리고 깨소금을 더해서 고추장 소스는 하나만 썼다.

면발을 차가운 물에 씻고 얼음을 꺼내 마사지도 시켰다.

찰랑찰랑거린다.


맛이 끝내준다.

내가 아무리 맛이 좋다고 해도 아이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아이들을 불러다 식탁에 앉히고 마치 면접을 보는 사람처럼 아이들이 한 입 먹기를 기다리고 있다.

강이는 내가 집에 왔다는 사실부터가 싱글벙글해서 맛은 뭐 아무래도 좋다는 분위기였다.

산이가 한 입 먹고, 다시 한 입을 먹는다.

세프는 맛있냐고 묻지 않는 법이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나도 젓가락을 뜬다.

내 입에 들어가는 비빔면은 맛이 발효되지 않는다.

평가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평가가 끝나야 뭐든지 목에 넘어가는 것이다.

"아빠, 맛은 좋은데 소스 이게 다야?

나는 좀 더 매웠으면 좋겠는데?"

그때서야 내 입에 들어가는 비빔면이 새콤달콤하다고 느낀다.

아, 이 정도면 맛있구먼, 이 녀석은 한 번을 그냥 안 넘어가네.... 싶다.

"고추장 소소가 하나 더 있는데 저걸 다 넣으면 너무 매워지고 조금만 넣고 버리자니 아깝고 그러잖아."

내 말에 수긍은 되더라도 자신이 기대했던 100% 만족도를 쉽게 포기하기는 어린아이여도 아쉬운가 보다.

음식을 만든 사람은 먹는 사람의 반응 하나하나가 신경 쓰인다.

정말 맛있는 건지, 아니면 립서비스인지 얼른 알아본다.

그런 면에서 아이들은 정직한 고객이다.

산이에게 냉장고에 따로 보관 중이던 고추장을 반스푼 덜어줬다.

이젠 만족을 떠나 '식사'를 했다는 기본에 충실할 시간이기에 아이가 나머지 비빔면을 잘 먹길 바랬다.

아이들에게 점심밥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니까.

끝으로 수박을 내놓고 매운 입속을 달래라고 그랬다.

"산이야, 매운 것을 잘먹는 사람하고 못먹는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게 되면 어느 쪽에 신경을 써야 할까?"

차분하게 물어봤다.

"매운 것을 못먹는 사람이지."

아이가 편하게 대답한다.

"그래, 그래야 함께 먹을 수 있는 거다."

옆에서 강이가 아빠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친다.

"다 먹고 아이스크림 하나씩 꺼내 먹어라."

나는 기분이 좋고 아이들은 손뼉을 쳐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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