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을 지나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여기는 어디며 지금은 언제인가.
누구에게나 젊은 날은 있었지만 누구나 그 젊은 날의 주인공은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비로소 알았다.
'찌꺼기'
애석하고 쓸쓸한 일이겠지만 내 젊은 시절은 어떤 술도 되지 못하고 조백 糟魄이었다.
술지게미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배고픈 시절 그걸 먹고 취했다던 이야기는 종종 들었다.
맑은 청주가 되라고 나는 배웠던가.
탁주라도 되어 사람들 속에서 위로라도 됐어야 했던가.
나는 물도 아니 되고 술은 더욱 되지 못하였다.
흐르지 못하였다.
소라닌이란 말은 감자에 싹이 트면서 생기는 독 毒이란다.
일본이어서가 아니라, 변화라는 생각이 든다.
변화는 다양한 모습으로 일어나는 것이 생리인데 인간의 변화는 시간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그렇게 서로를 싫어하고 증오하면서도 닮아가는 두 나라를 보고 있으면 사이가 좋지 않은 집안의 형제들이 생각난다.
일본 영화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타이틀을 선택하기보다는 영화에 어울리는 쪽을 고집하는 인상이다.
내 짐작으로는 예전에 이미 사람들이 좋아하는 쪽으로 많이 해봤기 때문에 별로 미련이 없어 보인다.
주거나 의복, 생활 패턴이며 사회구조 등 일상적인 양식들이 모두 그래 왔듯이 영화 제목도 곧 일본을 따라갈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고 자란 한국 땅의 성질이 강해서 그랬는지 '소라닌' 받아들이기 쉬운 타이틀이 아니었다.
하마터면 제목 때문에 영화를 놓치게 되는 우 愚를 범했을 뻔했다.
그러게 '소라닌'이 뭐냐, 정말!
참, 소라닌을 우리말로 하면 '솔라닌'이 된다.
밴드를 하는 세 남자는 친구,
그들을 사랑하는 두 여자도 친구.
'사람들의 인생은 매우 다양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두세 가지 형태에 불가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우리 중의 하나 (One of Ours)'로 1922 퓰리처 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윌다케더의 말이다.
영화는 윌다케더의 말이 아니더라도 호되게 가르쳐준다.
나는 기타도 드럼도 무엇도 연주할 줄 아는 게 없는데도 내 젊은 날이 영화에 나오는 그들과 다를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런데, 정말 다른 것이 있었다.
내 젊은 날이 한 잔 술이 되지 못하고 바닥에 가라앉은 술지게미밖에 되지 못한 장면들이 있었다.
고뇌하되 사랑할 것.
힘들어도 사랑할 것.
여리니까 더욱 사랑할 것.
삶을 사랑하고 상대를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일.
When I fall in love.
나도 그들처럼 방황했고 서툴렀고 넘어졌는데 나는 굿굿하고 담담할 줄 몰랐다.
녹슨 철문을 덮고 무성하게 자라는 덩굴을 내버려 두고 오래된 버릇처럼 질질 짜기만 했었다.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해맑다.
'죽어도 좋다.'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오는 우리 영화 포스터가 생각난다.
영화에 나오는 젊음들은 죽어도 좋다고 외치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있는 나는 죽어도 좋겠다고 외쳤다.
바보 같이.
겨우 영화나 보고서 그랬다.
내 꿈은 그런 것이었던가 보다.
'다 쏟아지게 사랑하는 것'
젊음이 어떻게 가버렸는지 모르겠는 사람들과 여행을 가면서 어떤 음악이 좋겠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보면 좋겠다.
둘 다 마음에 별 하나 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