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지옥 - 서시 / 유하

시의,

by 강물처럼

사랑의 지옥 - 서시 / 유하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 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의 캄캄한 감옥에 갇혀 운다




동그라미 그려봤냐

동그라미만 계속 그려대는 날, 있었냐


비 오는 날에도

그렸다는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릴 게 뭐가 있다고

그려지기나 하겠냐고

그런 빈말만 하다가 돌아왔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호박꽃이었던가, 노란 꽃잎에 울리던 진동이었던가, 아니면 잉잉거리는 꿀벌의 소리를 다 듣고 있던 가슴이었던가 어렴풋하고 어지럽고 어리둥절하다.

어슴프레 새벽이 오는 날에 너를 잃고 어디로 갈지를 몰라 호박이 자라는 마당에서 7월도 보냈고 8월도 보냈다.

연애하는 것들을 다 지켜보면서 부럽지도 않았고 외롭지도 않고 다만 말라갔다.

호박 줄기가 통통해지고 꽃이 열고 벌이 날아들고 향이 발기하듯 덤벼들어도 나는 마냥 하던 대로 썰물처럼 조용했다.

숨을 쉬지 않고 살기로 했다.

꽃이 떨어지고 호박이 맺힌 날에는 울어도 보았지만 소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서 하나 떨어지면 저에게서 하나 열렸다.

서리가 내리면 다 같이 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가벼웁게 날마다 뭐라도 빠져나가는 것이 좋았다.

심장, 발톱, 눈, 눈썹, 머리카락 그리고 너라는 그.....

그때에도 나는 한창 사랑을 하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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