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코로나 검사

가족의,

by 강물처럼

눈이 가렵거나 충혈이 됐을 때 안약 한 방울 넣고 나면 시원해진다.

한 방울, 그거면 된다.


아침에 일찍 서두른다고 해도 늘 바쁜 것이 우리들 일상이다.

밥을 미리 해놔도 그 밥을 먹는 시간대는 일정해서 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전체, 아침은 통째로 움직여야 하는 탓에 우리의 아침은 헤어지기 바쁘고 지각하기 일쑤다.

가능한 아침에 말을 시키지 않고 나 또한 괜한 말로 사람을 붙잡지 않는다.

모든 것을 간결하게, 어서 다녀오라는 말도 손짓으로 가볍게 그렇게 안녕한다.

그래서 잘 다녀오겠다는 말은 꼭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아침에는 헤어졌어도 다 헤어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직 마음은 그대로 우리가 하던 일에 머물고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를 거닐고 있을 거니까.

그러니까 아무렇지 않게 저녁에는 그냥 또 보는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그만큼 하찮고 가볍고 매번 반복되는 일이라 소원인지 모르면서 소원 같지도 않은 일이어야 한다.


수요일 아침, 여느 때처럼 엄마는 출근을 했다.

산이는 엄마하고 같이 등굣길에 동행을 했고 강이는 출근하는 엄마를 배웅하지 못하고 늦게 일어났다.

우리가 어떻게 하루를 보냈던가.

학원에 가고 친구들을 만나고 집에 와서 간식을 먹고 다시 책을 보고 TV를 보면서 우리는 엄마를 느꼈던가.

창문을 꼭꼭 닫아놓고 우리는 귤도 사이좋게 까먹어가면서 하루를 보냈다.

저녁에 퇴근한 엄마는 평상시와 달라 보였다.

계절이 바뀌고 바뀐 계절이 깊어지면서 한 번씩 앓던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눈 주위가 붉게 올라섰다.

출근하고부터는 줄곧 그렇게 좋지 않은 상태로 하루를 보냈다고 그런다.

세상은 코로나로 난리고 눈만 뜨면 쏟아지는 확진자 메시지도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저건 아픈 것이다.

몸살이 났거나 독감에 걸렸거나 코로나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순서대로 사태를 예측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본성인 것 같다.


강이와 산이는 표정과 동작이 여유롭던 안단테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아직은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데 강이는 금세 라르고에 올라타고 흐느낀다.

4학년은 그래서 알려줄 것도 덜 알려주고 볼 것이라고 다 보게 해서는 안 되는 나이가 맞다.

엄마는 아무래도 심각했던 것 같다.

아무렴 사무실에서도 책임이 있는 입장인데 지금은 아프지 말아야 하는 2020년 12월이다.

아프더라도 코로나로 아프면 안 되는 것이 지금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기본 소망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가져오는 여파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아서 어쩔 수 없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다.

한동안 확진자가 급하게 상승 곡선을 형성할 때 야간 코로나 검사를 받을 수 있었는데 목요일 밤에 엄마는 검사를 받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엄마는 스스로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마스크를 두 겹으로 착용하고 강이 방에 짐을 풀고 우리와 동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선을 그었다.

해열제도 없이 그 밤을 혼자서 앓았을 것이다.

두통약 하고 비타민으로 급한 대로 처방을 하고 우리는 내일 아침을 기다리기로 했다.


가려운 눈에 손이 간다.

씻지 않는 손은 위험하다.


다행이란 말은 하루에 한 번 복용하는 영양제처럼 잊지 말고 챙겼으면 한다.

내 힘으로 다 안 될 때 은근히 도움이 되는 그런 느낌은 햇살 같아서 사랑스럽지 않던가.

겨울에는 서로 도와야 빨래가 마른다.

30%의 볕으로도 얼마든지 다 마른 것들을 감촉하는 손바닥에 방금 유리창을 흩고 지나온 겨울 공기가 닿는다.

그것이 쓰는 말, '다행 多幸'

밤을 앓은 사람이 거실로 걸어 나온다.

출근이란 또 다른 차원으로 흐르는 감각이 아니던가.

나이가 들수록 물기는 빠지고 순도가 높아지는 것들이 사람을 둘러싼다.

마치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또 자식들을 입히는 일처럼 출근은 사람들을 말없이 응원한다.

일어서겠느냐, 그만 쉬겠느냐.

말없이 사람들에게 손짓한다.

어느 쪽이든 저 말없는 고요를 읽어낼 줄 아는 사람들은 자기 몸을 자기가 이끈다.

그때부터 우리는 아주 늙어가기로 하고 또 우리는 한 사람이 되고, 그 한 사람은 동시에 둘도 셋도 넷도 거느리는 숭고함이 베어난다. 불이 타는 것이다.

엄마는 따뜻했을 것이다.

그것이 몸살이었을 것이고 그것이 감기였을 것이며 그것이 코로나였을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성분이 아니라 산소를 끌어모아 공기를 데우는 따뜻한 불심이다.

그래서 기꺼이 희생이라고 불러도 좋을 환한 성탄 불빛이다.

괜찮아진 것 같다는 말을 하고 혹시 모르니까 오후에 선별 진료소에 가겠다며 집을 나서는 애들 엄마를 배웅할 말이 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무덤덤하게 그러라고만, 마스크 잘 챙기라는 말만 건넸다.


엄마가 지나간 자리를 강이는 더듬는 것 같았다.

엄마 증상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제가 아는 코로나는 구토가 나오니까 엄마는 아니라고 일러준다.

열이 높아야 하는데 엄마는 높다가 낮아지니까 또 아니라고 그러고, 밥맛이 없고 맛을 못 느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니까 아니라고 두 번, 세 번 나한테 절대 코로나가 아니라고 그런다.

왜 아빠는 저처럼 말해주지 않을까?

아빠도 저하고 같이 나란히 서 있으면 좋을 눈치가 보인다.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거울로 보는 오른쪽 눈동자에 붉은 실핏줄이 섰다.

맑은 거품 같은 것이 보이는 것도 같고 어쩐지 흐릿하다.


엄마는 보건소에 가서 진료를 받고 왔다.

금요일 결과가 나올 때까지 엄마는 강이 방에서 나오지 않기로 했다.

강이와 산이는 연 이틀 나하고 잠을 자면서 웃기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것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 알겠다.

저희도 심란한 것을 어쩌지 못하고 자꾸 우울해지는 것도 싫었던 것이다.

집에는 엄마가 있어야 활기가 돈다.

심장의 온기로 피를 데우고 그 피가 몸을 돌면서 사람이 마음까지 따뜻하게 품어내는 것처럼 엄마는 온기가 된다.

하루 이틀 온기를 잃은 아이들이 발전기 같은 아빠하고 지내면 얼마나 잘 지냈을까.

겨우 김치 같은 김치로, 된장국 같은 된장국으로 밥 같은 밥을 먹었을 뿐이다.

강이는 엄마를 위해 8번 기도를 했다고 그랬다.

어디에서 언제 그 기도를 다 했을까.

사람들 없는 곳에서 기도하는 줄 아는 강이는 어디에서 무릎을 꿇고 뭐라고 기도했을까.

CCTV라도 있다면 하느님만 보셨을 그 모습을 한 번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당분간은 방법이 없겠다.

11살짜리 하고 노심초사라는 말이 어울린다는 말은 터무니없다.

노심초사 勞心焦思는 마음을 다 쓰고 속을 태우는 마음이다.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 않고 먹을 것을 입에 넣고도 맛이 나지 않는 것이다.

태울 것이 어디 있다고 그랬을까 싶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 상태를 물어본다.

그때마다 코로나는 아니라고 다짐하듯 말하는 것이 꼭 코로나 이후를 각오하는 것도 같았다.

눈물이 나오려고 하면 어떡하냐고 물으면서 벌써 눈이 빨갛다.


아빠는 눈이 충혈되었고 너는 눈이 슬프구나.


금요일에 오기로 했던 결과는 오지 않았다.

오지 않은 결과를 마냥 기다리기에는 아이들의 걱정이 크다.

산이와 강이는 엄마하고 장난치면서 잠자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만 마음을 졸였으면 싶은 것이다.

작은 것들이 숨 쉬기에도 바쁜 심장이 애를 태우는 사흘이 지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연휴였던 탓에 보건소가 운영되지 않았던 것인지 우리는 영문도 모른 체 하룻밤을 더 기다려야 했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아프면 가족이 모두 그 테두리 안에서 영향을 받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리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우리끼리 웃고 즐기면서 영화까지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일찍 거실 불을 끄고 조용히 우리는 이부자리를 펼쳤다.

오늘도 웃기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산이와 강이의 부탁도 힘이 없었다.

해주면 좋지만 안 해줘도 무방하다는 마음이 쏟아진 물처럼 안방에 흥건했다.

마른 수건으로 젖은 것을 닦아주려고 아빠가 세상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에 짜깁기를 한다.

똥도 귀신도 우리가 아는 '장연이도' 등장시키고 짬뽕에 짜장면까지 요리해 낸다.

웃음 끝이 멀겋게 떴다.

내일은 어떻게 될까?라는 말을 남기고 아이들이 잠에 들었다.


토요일,

나도 별 의욕이 없었던 것이다.

무슨 요일인지 깜박 잊었으니까, 4년 가까이 써오던 아침 기도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일기를 쓰면서 점검이 되었다.

수요일부터 애들 엄마가 몸이 안 좋았고 나도 안과에 다녀왔으며 아이들은 지금 걱정하고 있다.

내가 한참 아팠을 때 썼던 아침 기도를 몇 편 읽어보았다.

그중에 '평화를 위한 기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오늘 아침은 이 기도에 기도를 얹자.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아침에 산이와 강이가 일어나면 크리스마스에 못한 선물이라며 적어줘야겠다.

아이들 일기에 적어놓고 오랫동안 거기를 지켜주길 바랬다.


아침 9시,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받고서 식구들이 모두 깨어났다.

음성입니다.

서로들 논공행상 論功行賞으로 바쁘다.

누가 얼마나 걱정했는지로 상을 받는 시스템은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눈이 시원하다.

안약 한 방울에 2020년 마지막 토요일이 맑게 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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