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켜지듯 환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소설책에서 봤던 장면이 아니라 오래전 이웃에 살던 이모 - 우리에게는 수많은 이모들이 있습니다. -한테서 들었던 이야기 한 토막은 이렇습니다.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다가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애들 아빠가 그러는 거야.
´당신이 오니까 내 마음이 환해졌다. ´
그런 소리 듣고 있으면 어디 도망갈 마음도 다 사라지고 그저 측은하다니까."
엄마하고 친한 아주머니들은 모두 이모라고 부르는 나이였는데도 저는 의상실 아줌마라고 내내 불렀습니다.
하지만 진짜 이모들 못지않게 어쩌면 더 친근감 있고 다정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그 이모의 남편은 - 이것도 곁으로 들었을 뿐이지만 - 어딘가 몸이 불편했고 그래서 평범하지 못한 일상을 살던 분이었습니다.
지금은 두 분 모두 소식이 끊겼습니다.
´환하다´라는 말이 형용되는 순간을 포착하라고 하면 저는 내가 목격하지 못한 이 장면을 제출할 것 같습니다.
눈으로 본 것은 아닌데 그 이상의 장면을 찾아낼 재주는 없습니다.
그 이후로도 환한 것들을 마주치고 경험했지만 그때마다 이 장면은 절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정말 환한 것에는 마음이 작용합니다.
´환했던´ 마음은 긴 터널 같은 시간을 견뎌낼 힘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추억이 재산이라고도 하는 것 같습니다.
늘 잊히지 않고 때때로 떠오르는 김소운의 소중한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은 그것이 무엇인지 맨 처음 알게 해 줬던 고마운 작품이었습니다.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그런 작품이 아니라 그런 삶이었던 것은 아닐까.
어디를 빙 돌아서 왔는지 차분하게 더듬어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정말 늦었을 때라고 뼈를 때리는 것이 요즘의 유머입니다.
늦었어도 환해질까 합니다.
환해지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누구 도움이 꼭 필요할 것도 아니니까요.
어제 내가 환했던 순간이 하나 있었다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 요한 14:1
내 이름을 이렇게 반갑게 부르는 손짓이 ´카톡´으로 왔습니다.
´마음이 통했나 보다. 이 글을 읽자마자 답장을 쓰게 되었네. ´
이렇게 시작하는 말, 두고두고 추억이 될 말을 한 글자씩 빛을 비추듯 바라봤습니다.
누가 기도를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저 같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좋고 거룩한 기도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