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뭘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처음 있는 일입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입을 떼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만든 구덩이에 빠지는 처지가 됐습니다.
심지어 오늘 새벽에는 머뭇거렸습니다.
일종의 ´회의´가 찾아든 것입니다.
기도하면 뭐 하나, 사람이 이 모양인데 묵상 같은 것이 무슨 소용인가.
회의 懷疑는 의심을 품는 것입니다.
의심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면 괴롭습니다.
괴로운 것에도 종류가 많습니다. 고뇌하고 번뇌하고 오뇌 懊惱 합니다.
그래서 백팔번뇌라고 합니다.
사람 마음속에 그 많은 괴로움이 밖으로 뛰쳐나올 때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글이 낫습니다.
저보다 믿을 것은 글인 듯싶습니다.
열 줄, 겨우 열 줄 적은 것이 어제 하루를 침묵으로 보냈던 속에 길을 내줍니다.
바늘구멍만 한 틈, 바람이 통하는 길, 빛이 새어 나는 통로만 있어도 터지지 않습니다.
사는 일이 움푹진푹하다고 푸념할 때가 있습니다.
삶이 아니라 사람 마음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릇으로 쓰는 것이 마음이고 삶은 거기에 담는 물 아니던가요.
그렇다면 어제 제 마음은 일그러지고 쭈그러진 양은 대야였습니다.
괜한 물에다 어깃장을 놓는 삐뚤어진 심사 心思는 나이를 이쯤 먹었어도 그대로였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조계사 앞에서 ´오직 예수´라고 쓴 팻말을 들고 있는 그 마음은 무엇일까 싶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괴롭힘´은 아닌지요.
괴롭고 괴롭히는 무수한 작용들, 그것들을 바르게 ´회의´할 줄 아는 일은 어느 시절에나 가능할까 싶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아이들과 함께 걷기로 하고 내심 즐거웠던가 봅니다.
산에 가자던 다른 약속도 뒤로 미루고 하루 잘 걸어볼 생각이었습니다.
호변을 걸을까, 산과 들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길을 걸을까, 아니면 산속의 길로 접어들까 생각했습니다.
출발만 하면 되는 판국에 자고 일어났더니 다리가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모습은 도무지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가 어떠냐는 말도 묻지 않았습니다.
´가기 싫으면 가지 마´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그것도 좋은 말은 아닌데 사람은 일이 벌어지고 나면 최악은 피했어야 했다고 후회합니다.
´앞으로 안 가´
개점휴업 상태로 하루를 그냥 보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딸아이가 말을 걸어와도 대꾸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말을 걸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뒤는 아시다시피 스스로도 잘못인 줄 알면서 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저녁 먹을 때라도 분위기를 바꿨어야 했는데 혼자 챙겨 먹고 방에 들어와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이나 애들 엄마는 얼마나 불편했을까 싶습니다.
제대로 움푹진푹한 날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7:26
보조를 맞춘다는 것은 걸으면서 시작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걷고자 한다면 걷기 전부터.
내가 더 나이를 먹고 아이들이 한창일 때, 그때에 내 걸음에 맞춰 줄 아이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제는 나만 생각했던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