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 다른 사람에게 받았던 찬사나 칭찬 가운데 가장 좋았다 싶은 것은 어떤 말이 있는지요.
마음에 쏙 들어서 잊히지도 않는 그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누가 저더러 ´너는 세상의 빛이다´ 그런다면 - 지금 직접 말해보고 상상해 보니 - 영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를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런 말에 익숙하지 못하고 또 나 자신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도 만약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이라고 써놓고 다른 사람들 없이 오직 둘만이 있는 공간을 떠올려 봅니다.
부끄럽겠지만 처음에 느낀 부끄러움 하고는 사뭇 다른 느낌을 갖습니다.
부끄러움은 특이합니다.
그것은 죄의식일 수도 있으며 소박한 살림살이같이 흔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 보는 대상에게서 느끼는 것이라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에서도 사그라들지 않는 감정입니다.
내 결핍에서 오는 그것은 위험하기도 합니다.
윤동주의 서시 序詩에 나오는 부끄러움 - 한 올의 실가닥을 떨리게 하는 잎새에 이는 바람 - 은 제가 아는 가장 작은 모습이면서 동시에 어쩔 수 없는 괴로움 같은 것이었습니다.
부끄러움을 건네는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교육되는 부끄러움은 자가증식을 거듭하다 자아 自我를 다 잃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 부끄러움의 건너편 자리에는 무엇이 지키고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위대합니다.
세상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나 혼자 부끄러운 것입니다.
내가 부끄러워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찾아내는 스위치 같은 것입니다.
저 불을 켤까 망설이는 순간 내 앞에 펼쳐지는 양탄자 같은 의연함이 거기에도 있습니다.
그것이 슬픔이나 분노, 외로움 같은 것으로 옷을 갈아입기 전에 그 본연의 모습을 마주하고 싶습니다.
내 부끄러움의 원천, 나는 그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내가 그것이고 그것이면서 나, 한올지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어디에 가야 볼 수 있을지요.
그래서 믿음이 거울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늘이 거울입니다.
하늘은 어디에도 있고 언제든지 있습니다.
사람은 가르치지만 하늘은 기다립니다.
부끄러움의 차이가 거기에서 생겨납니다.
사람이 만든 부끄러움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그 세상으로 걸어 나옵니다.
빛처럼 걸어 나옵니다.
그 빛은 부끄러움을 태우거나 말리지 않습니다.
그 빛을 받으며 더 생생하게 자랄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입니다.
하늘이 키운 부끄러움은 발랄해서 나팔꽃 위에 맺힌 이슬로 미끄럼을 타러 세상에 나옵니다.
나는 그렇게 부끄러워하기를 오십이 넘어서야 약속합니다.
여태 내가 키웠던 부끄러움을 어디 가서 싹 씻어주고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수고했다, 내 아들 같고 딸 같은 너야,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 마태오 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