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그늘 아래 있습니다.
참혹하다는 말을 몇 번쯤 하면 삶이 다 살아질까 싶었습니다.
의사 선생님 앞에는 막내 동생이 앉아 있었고 저는 보호자로 그 옆에 서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좋지 않았습니다.
말이 사실을 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더 나쁠 것이 없는 사람이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진료 시간이 다가오면서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내가 어쩌지 못할 일인데 그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 맞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잠을 자면서도 생각은 달리고 있었던 듯, 쉽게 잠에서 깼습니다. 10년이 넘게 내 말을 듣지 않던 아이였지만 혼자 거기 진료실에 앉아있게 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1주일 전에 병원에 오면서도 도로에서 멱살을 잡고 다퉜던 막내였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는 담배 냄새가 자욱했습니다.
그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도 실감 나고 어쩔 수 없구나 싶은 생각에 계속 앞만 보고 차를 몰았습니다. 피로에 젖은 것처럼 사람 마음이 후줄근했습니다.
침묵을 깨는 것도 내 몫이었습니다.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이제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말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말을 꺼내긴 했지만 말할 마음도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허전했습니다. 어떤 말을 할까, 무슨 말이 좋을까 여기저기를 뒤적거리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럴 힘이 없었습니다.
"너 하고 싶었던 거, 그거 하면서 살아. 사실 엄마는 병원에 모시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좋은데 너하고 엄마한테 도움이 되라고 시기를 보고 있는 거야. 엄마 때문에 뭘 못하거나 그러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몸도 마음도 좋지 않은 아이가 뒷좌석에 앉아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저는 그의 원망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는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자리를 찾지 못하면 망치도 되지 못하고 그 흔한 못도 되지 못하여 쓰임을 부여받지 못합니다. 쓰이지 못하는 자의 설움이 그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가 다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해할 수 있는 타인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상황은 이해가 되면서 사람은 그렇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약점이면서 생존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말씀의 그늘 아래 머물러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 5:26
빚진 기억은 없지만 그 빚을 갚아야겠다는 마음입니다.
인연이 내게 허락한 그것을 잘 받아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느 분이 그러시더군요, 아내나 자식이면 그러지 못할 텐데 동생이어서 18년 동안 죽을 날만 기다리는 오빠를 돌보며 지낸다고...
바람이라도 쐬러 다녔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해본 적 없는 아이라서 어쩔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