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해하는 녀석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동네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란 장면이 삭제된 채로 우리 아이들의 성장기를 기록하는 일이 또한 적적합니다.
"우리 배산이나 한 바퀴 돌자."
5학년 여자애는 뚱한 표정을 하며 따라나섰습니다.
곧 매미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맴맴 거릴 작은 숲길을 걸었습니다.
한 바퀴 도는 데 30분이 다 걸리지 않는 길입니다. 그래도 있을 것은 다 있는 배산입니다.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아이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기분을 살핍니다.
´혼자 오길 그랬나´ 싶은 생각이 살짝 들기도 했지만 나도 좋고 저도 좋으면 두 배로 좋은 일이니까 기분을 맞추기로 합니다.
기분 맞추기 제1의 법칙은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재밌어?"
이렇게 한마디 먼저 표시해 주면 그 뒤로 서른 마디쯤 되는 말들이 줄줄 이어집니다.
10분 만에 집에 있던 사람에서 숲에 있는 사람으로 달라집니다.
포기가 아니라 적응을 하면 사람이 주체적으로 숨을 쉽니다.
´천천히 걸어. ´
말이 다정하게 들리고 양념처럼 둘 사이에 배는 다감 多感한 분위기로 걸음이 깡충거리는 것이 보입니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웃었습니다.
"나무가 이렇게 두껍게 자라는 데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 서 있었을까?"
거기에서부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인인 줄 아는데 그래서 여기저기 쓰레기도 버리고 마음대로 하는데 사실 우리야말로 손님이지.
손님이 주인처럼 굴면 안 되는데 완전히 반대로 됐어."
녀석이 무엇을 알아들었는지 말이 끝나자마자 대꾸를 해옵니다.
"자본주의처럼"
글쎄, 나는 너한테 그런 소리 한 적이 없는데, 너는 어디에서 얻었지?
묻고 싶은 것 위로 웃음이 먼저 새었습니다.
그 순간 두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이거 한쪽으로 치우치면 곤란한데,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는데... ´
또 하나는 ´ 어쭈, 말하는 것 좀 봐라, 뭘 좀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
아비는 또 아비인가 봅니다.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구나."
대신 목소리는 가라앉히고 평범하게 말했습니다.
어쩌면 걸으려고 나왔던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려고 나왔던 것 같습니다.
걸음은 몸에 기억되고 이야기는 마음에 기억되어 통째로 추억이 됩니다.
저녁에는 잠시 ´스트레이트 뉴스´에서 ´인격 살해´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기사를 봤습니다.
두 가지가 또 인상에 남았습니다.
서울대 학생생활관 청소 노동자의 죽음을 보면서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기가 막혔던 얼마 전이 생각났습니다.
다시 보는데도 나 자신이 모욕스럽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또 하나는 27살 먹은 젊은 입주자가 아버지뻘 되는 관리 직원에게 욕을 하며 대드는 모습이었습니다.
´너, 아파트 있어? 너 차 있어? ´
´니 애미, 애비는 있어? ´
미안하지만 정말 ´개차반´이 이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점점 분명하게 증상이 드러나고 확연히 횟수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전조증상이 나타날 때가 치료의 골든 타임입니다.
운 좋게 재난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더 있을까요.
벌써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가 쌓아 올려진 결과가 한 번의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작은 사고들을 겪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한테 떨어진 일이 아니라서, 내가 당사자가 아닌 것에 고마워하고 혀만 끌끌 차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마태오 10:42
상 賞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받을 상은 어떤 상입니까. 어떤 상이 받고 싶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상은 사람들이 주고받는 상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1등을 가리는 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상입니다.
이 상 常은 어떻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대신 떳떳한 상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