短想 1

시인 그리고 詩

by 강물처럼

詩를 쓰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거기 어울리며 사진을 찍고 그러는 것을 보면 확실히 많아졌습니다.


시인 詩人이라는 호칭이 좋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생깁니다.


시를 잘 쓰는데 시인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지만 그 경우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삶을 존경하다 보면 그 사람의 말이나 글이 호수처럼 잔잔해지는 지점에 다다르니까요.


항상 문제는 사람이 글을 따라가지 못할 때입니다.


글은 하늘 같아서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사람을 떠올리면 순식간에 추락하는 경험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수양인 듯싶습니다.


붓으로 글씨를 쓰는 일조차 우리는 서예 書藝, 일본은 서도 書道라고 부르면서 수양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기도 하지만, 어두운 밤에 교회 십자가를 하나둘 세어볼 때가 있습니다.


더 늘었나, 몇 개 줄어들었나 그러면서 보이는 데까지 세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늘 제 결론은 같습니다.


´그래도 많은 것이 낫다. ´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에 나와 세상을 크게 각성시켰다고 인정되는 책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10년 넘게 늦었습니다. 그래서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반론할 거리를 찾으려고 읽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만큼 알고 있는 것도 없습니다.


다 읽고 나면 ´변할 것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변하지 않을 거라고 외면서 책을 읽지도 않을 것입니다.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결합해야 물이 됩니다. ´


빗방울이 쏟아지는 하늘은 하나씩, 홀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그리는 세상을 보는 듯합니다.


저 그림을 도킨스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호기심이 납니다.


물 분자가 그리는 작용일지, 그것들의 원자들의 충돌일지, 아니면 외롭게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들의 비명소리인지, 무엇인지.



노자가 좋은 이유는 쓸모없음의 쓸모, 무용지용, 無用의 用에 있습니다.


쓸모없는 것을 쓸모없다고 하는 것은 합리일지 모르나 도 道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저 글자를 왜 ´길´이라고 불렀을까, 그 우연이 신비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길을 路 따라 걷고, 어떤 사람은 길 道을 따라 길이 됩니다.


많은 시인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요즘입니다.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기에서 거기로 가는 편지가 늦은 김에 ´시 詩 한 편´ 동봉하고 싶습니다.


이것도 선조치, 후보고의 형식을 취할 것 같습니다.


원작자의 허락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시는 이렇게 쓰면 좋을 듯하고, 삶도 그러함이 어떨까 싶어 함부로 화살을 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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