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109

아침에,

by 강물처럼

일단 등에 진 것들은 무겁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렇고 내 속으로 난 자식이어도 끝내는 무겁습니다. 물리의 세계는 그것이 맞습니다. 계속 업고 갈 수 없습니다. 어깨에 짊어지고 등에 태우고 머리에 이고 살아가기 어려운 것을 아니까 짐꾼을 부립니다. 짐꾼은 내 짐을 지고 가지만 그 짐꾼의 삯은 내 몫입니다. 돈이 많든 적든 어딘가 내 지갑에서 나가야 하는 돈입니다. 그 돈은 거저 생긴 것이 아니라 또 내 창고에서 부지런히 팔렸던 어떤 것의 대가입니다. 그것이 곡식이 됐든 기술이 됐든 지식이 됐든 하여간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한다는 것은 쓸모 있다는 것입니다. 쓸모가 있는 것이 만들어지기까지 나는 쓸모를 위해 또 내 쓸모를 써가면서 그리고 닳아가면서 또는 바꿔가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공 空으로 된 것은 없습니다. 공짜라고 할 때 쓰는 저 비어있음이 공 空입니다. 두 번 겹쳐서 속을 비우면 공허 空虛가 됩니다. 공허한 것은 어떤 심정이었던가요. 잊힐만하면 꼭 떠올려봐야 할 약 藥이 되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다시 그 비어있음이 헛되다는 것의 형태임을 적고자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늘이기도 합니다. 어느 쪽으로 가시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두 길이 모두 이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결국은 알 것 같습니다. 헛된 것이 쓸쓸하지 않는 지점에 도착해 보면 풍경이 다를 것이라고 믿습니다. 거기는 어디쯤일까요. 저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성이나 깨달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것들의 변용이랄까, 순간순간 일어나는 변화 또는 이동 같은 것.

말하자면 스무 살의 나를 마흔 살의 내가 되새김질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쉰 살의 내가 예순 살의 나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더 쉬울까요. 내가 나라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 앞에 바쁘게 걸어가는 저 아주머니가 나구나, 저기 운전을 참 기분 나쁘게 해대는 젊은이가 나구나. 바람이 부는구나. 다시 눈이 내리는구나.....

가끔 산문 山門에 든다는 말을 어딘가에서 들을 때가 있습니다.

불가 佛家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를 이르는 과정입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잘 모르고 떠드는 소리니까 크게 개의치 않았으면 합니다. 해탈이라는 말도 어렵긴 한데 그윽한 어떤 느낌은 있습니다. 절에 가면 해탈에 이르는 문들이 있습니다. 모르고 거길 지나가는데 문 하나를 지날 때마다 공 空, 무상 無相, 무작 無作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우고 잊고 일체의 작용이 없는 단계를 밟는 것입니다. 저기 나오는 저 비우는 형태가 우리의 일상이 되는 길거리나 식당, 학교, 사무실 어디에서든 체험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산에 가서야 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산을 여기에 끌고 와서 - 물리적으로는 그럴 수 없지만 - 맑은 것을 곁들이는 것입니다. 그거 어떠냐고 여쭙는 것입니다.

'말로 설할 수도 없고 나타낼 것도 없고 인식할 것도 없어서 일체의 문답을 떠난 절대 평등의 경지'가 '불이 不二'입니다. 이런 식으로도 말하면 안 되는 것, 그래서 오직 침묵으로만 대답할 수 있는 세계가 그것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오 11:28-30

예수님의 세계에 차별이 없습니다. 구분이 없고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편한 것이 아니면서 편한 것, 가볍지 않으면서 가벼운 것 그러면서 또 가볍지 않은 것. 그 멍에를 내 어깨에 메어봅니다. 나에게 메어진 것들, 내가 멘 것들이야말로 모두 '인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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