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112

아침에,

by 강물처럼

비를 쏟아낸 구름 사이로 무지개가 크게 나타났습니다.


저렇게 큰 무지개는 처음이었습니다. 검고 흰 구름이 우람한 근육을 뽐내는 여름날 늦은 오후였습니다.


장례식장을 향하는 도로 위에서 - 그러면 안 되는데 - 운이 좋다고 생각했을 만큼 멋진 무지개였습니다.


타인의 죽음은 이렇듯 형식적입니다.



지금은 장례식장에 가서도 밥을 잘 먹습니다.


군대에 다녀왔던 그 해 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집에서 초상을 치렀던 마지막 세대가 나였던 거 같다고 엊그제 들렀던 장례식장에서 떠올렸습니다.


그때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상주는 밥을 먹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사실 슬픔 자체보다 놀람이 컸던 아버지의 부음이었습니다. 슬픔은 현장에서 솟아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는 늘 소란스러움이 앞서서 등장합니다. 슬픔은 사람들이 돌아가고 모든 것이 가라앉았을 때 지그시 눌러가며 찾아옵니다.


빠짐없이 꼭꼭 초인종을 누르며 예비군 훈련 소집 통지서를 나눠주는 병사 兵士처럼 그렇게 나를 찾아냅니다.


많이 슬플 줄 모르는 슬픔이 막연한 슬픔이며 막연한 것이 큰 슬픔이란 것을 배웠습니다.


두고두고 갚아야 하는 빚은 한 사람의 삶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슬픔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저는 그 자리에서 다 쏟아내는 사람들이 때로는 보기 좋습니다. 가만히 그들의 통곡을 듣습니다.



슬픔이 밥을 삭히는 장면을 인생에서 몇 번 마주치게 됩니다.


스무 살 적에 찍은 그 장면을 다시 보게 되면 많이 어색할 것 같습니다. 저것이 나였던가 싶어서 어금니에 힘이 들어갈 것만 같습니다. 다른 것은 그런대로 봐 넘기겠는데 내 위선적인 모습은 놓치지 않고 바로 알아볼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창피한 것이 내내 아쉽게 남을 것입니다. 슬픔이 연기 같구나. 내가 나한테 걸려서 턱 하니 숨이 막힐 것입니다.



밥.


가족이란 말은 밥이란 단어하고 상상을 뛰어넘는 구도로 어울립니다. 사람이 그리지 못하는 선 線으로 그려놓은 그림 같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튕기지 못하는 줄로 연주하는 멜로디가 거기에서 흐릅니다.


우리에게는 식구 食口라는 특별한 말이 있어서 혈연이란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하는 심층 深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밥 한 끼 먹자. ´가 다른 어떤 인사보다 한국적인 정감과 한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밥 먹을 수 있는, 밥 먹고 싶은 사이가 우리 식의 공동체 의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 말아서라도 먹으라는 말은 다 써도 쓰지 말아야 할 종잣돈 같은 말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삶은 슬픈 장면에서 또 다른 곳으로 흘러들어 가는 연속이니까요.


기억에서도 다 사라진 고마운 사람들에게 기다랗게 상을 차려놓고 밥을 대접하는 일.


그들이 챙겨준 밥을 먹고 이만큼 기운 내서 살아온 일이 모두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고마운 밥, 인연, 사람들, 가족 같은 사람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오 12:49-50



어떤 사람들은 제사도 지내고 어떤 사람들은 기념을 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정성을 들입니다.


저는 무엇으로 그것들을 대신할까 싶습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그것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남모르는 비법이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흔한 일이어서 그렇습니다.


거기까지 다 말하면 은근한 맛이 없습니다.


저는 저대로 가보겠습니다.


행운을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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