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쫓는 아이

영화의,

by 강물처럼

어떤 대상을 잡거나 만나려고 뒤를 급히 따라간다. - 쫓다

목표나 행복들을 이룰 때까지 노력한다. - 좇다


일본 영화, 星を追う子ども。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라피티 작가 뱅크시는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묻는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2011년 영화를 봤다. 무료에 더군다나 토요일 밤이었다.

로또를 사는 것도 다 잊을 만큼 더위가 한창이다. 이른 저녁을 먹고 바람개비가 길 양쪽으로 펼쳐진 성당포구까지 드라이브를 나섰다. 나는 아무래도 영화 같은 삶을 좇는 것 같다. 하늘을 배경으로 강물과 길,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내가 내주지 않아도 기꺼이 나에게서 흩어지는 것, 홀쭉하게 주름지게 가볍게 나를 빠져나가던 시간이 하늘에 오르던 여름날 저녁 6시 45분. 맑음 그리고 상실, 다만 행복.


그랬을 것이다. 끝맛이 달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려놓으면서 영화를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별을 쫓는 아이'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먼 데에서부터 거꾸로 나에게 쏟아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만났지.


별은 쫓는 것일까, 아니면 좇는 것일까. 육두문자가 연상되는 것은 나만 그럴까.

영화 제목은 별을 쫓는 아이가 되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좇는 아이가 맞다. 심지어 쫓느냐 쫓기느냐처럼 능동인 듯하면서 피동이 되는 그런 원형을 영화에서는 경험한다. 내가 좇는 것과 나를 좇는 것이 같다면 어떡하겠는가 묻는다. 아스다와 모리사키 류지는 지하세계 명부 冥府, 아가르타에서 산 이와 죽은 이를 겹쳐 떠올린다.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모비우스의 띠를 머리에 쓰고 신나게 그리고 아프게 다가선다. 상실을 -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 목격한다. 한 번에 한 번의 만남만 허락된 것은 여기서나 거기서나 영 마찬가지여서 차라리 존재가 없고 말 것을 기억하는 일이 더 쉽다. 나는 너를 기억한다. 너의 이름은, 그래 여기 '아가르타'에서는 별이 없다. 별이 없는 곳에서는 평범하게 오래 사는 일상이 흐른다. 지상인이 허락되지 않는 지하에서는 소원을 빌 일도 없다. 소원은 나처럼 더위 속에서 살거나 잊지 못할 사람을 한 사람 곁에 두고 사는 이들의 몫이다. 우리에게는 소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필요함을 나는 거부한다. 필요해하지 않는, 요구하지 않는 문장, 나는 시킨다. 내가 쓰는 문장은 사동 使動이 되어 너를 웃게 하고 너를 외롭게 하지 않고 너를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나의 클라비스는 거기에 들어맞는 펜이다. 그것으로 너를 쓴다.

아빠가 없는 아스나는 아빠가 남겨준 광석 라디오로 음악을 들었다. 그 음악은 매개 媒介다. 영묘 靈妙한 허구가 한껏 떠벌려진 입으로 뛰어든다. 낚시에 걸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땅에서 구경하지 못하는 신세계로 이동한다. 운임은 알다시피 너의 이름, 명부에 새길 그 운명이다. 사람다운 사람만 따라나서라. 두려움을 알고 천진하며 은하수를 동경하여 세상에 나온 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 따라나서라. 그래야 쫓아가든 좇아가든 큰 범위의 삶이 연속될 수 있다.

너는 삶을 사느냐, 영화는 묻는다. 모든 영화는 그것을 묻는다. 네 삶을 사느냐.


죽어도 보고 싶은 사람을 가졌는가.

그대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선생의 결구 結句가 사랑이었다니, 나는 이리도 좋구나. 신카이 마코토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이웃 나라의 중년 하나를 구해놨다. 물속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족'이야말로 깨달음의 경계에서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이었다. 사람들마다의 분신, 페르소나가 되어 그들을 잡아먹고사는 두려움의 실체. 아, 지자 知者는 물을 좋아하여라.


아내가 죽은 모리사키는 바닥까지 내려간다.

은유다. 그는 은유에 잠겨 세례를 받아야 한다. 아내를 살리려 그가 달려왔던 길은 신성 神性을 빼앗겨버린 물이었다. 마셔도 갈증이 풀어지지 않는 물이며 나는 보이고 너는 보이지 않는 불투명의 흐름이었다. 강인한 정신이었으며 그것은 애달펐다. 사별 死別은 그런 것이다. 그러지 않던가, '누구나 상처를 갖고 살아간다.'던 혼잣말이 흐르지 않던가.

남자에게서 구원은 여자다. 여자의 구원은 다른 희생 하나를 목격한다. 여기에도 속하지 못하고 저기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 아마도 그의 이름은 新이었으면 한다. 새로운 것, 그야말로 신이 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적을 줄 알고 소리를 연주할 줄 알아야 한다. 죽은 에우리디케를 위해 저승까지 내려가 리라를 연주했던 오르페우스를 기억해야 한다. 비록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슬픔을 부여받더라도 말이다.

나는 별을 향해서 곡을 연주한다.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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