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바보 이력서
친구들은 명예와 돈을 미리 내다보고
법과대학에 들어가려 혈안일 때에
나는 영원과 아름다움을 꿈꾸며
어리석게 문과대학을 지원했다.
남들은 명문세가를 좇아
배우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자란
현모양처를 구했다.
이웃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강을 넘어
남으로 갔을 때
나는 산을 떨치지 못해 추운 북녘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사람들은 땅을 사서 값진 과목들을 심을 때
나는 책을 사서 몇 줄의 시를 썼다.
세상을 보는 내 눈은 항상 더디고
사물을 향한 내 예감은 늘 빗나갔다.
그래서 한평생 내가 누린 건 무명과 빈곤이지만
그래서 또한 내가 얻은 건 자유와 평온이다.
마침 일요일이라 성경 구절을 접할 수 있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 고린도후서 4: 18'
아이들에게 '추상명사'를 가르칠 때 눈을 감고 시작한다.
"너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고 친구랑 같이 있으면 즐겁고 그런 것을 두 글자로 뭐라고 그래?"
"우정이요!"
"그래, 우정이란 게 있어, 없어?"
"당연히 있지요!"
"그럼, 보여, 안 보여?"
아이들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인다.
눈을 뜨고 세상을 밝게 만든 다음에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있긴 있는데 안 보여, 그래서 셀 수 없는 거다."
세상에는 중요한 것들이 많다.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로 나눌 수 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느냐는 내가 설명하지 못하겠다.
보이는 1, 아무것도 없는 0, 둘 다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거든.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은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진실이다.
처음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아이들에게 소개해줄 때는 각별히 정성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무래도 아이들은 균형감각이 없거나 약하기 마련이라서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으로 단정 짓기 쉽다.
아이가 꿈을 꾸며 자라기를 바란다면 허공에 대고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마음을 키워줘야 한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나는 '수업'이란 것이 의미심장해서 조심스럽다.
이 시를 읽으면서 임보 시인을 찾아보면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소개된다.
그런 사실을 알고 다시 읽어보면 지나친 '겸손' 같아서 처음 읽었을 때보다 솔직히 거리가 느껴진다.
출판사에 다녀온 날에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등단한 작가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름 난 유명인도 아니라서....."
누가 내 이력을 물어오면 찔끔거리고 만다.
이력을 물어오는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기에 뭔가를 보여주지 못하는 '모자람'이 속을 찌르는 것이다.
그렇게 또 내 고생 많았던 친구, '나'는 제 뜻과는 상관없이 무안하다가 창피하다가 그러고 만다.
그런데,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서라도 나는 나에게 아까는 미안했다고 사과해야 한다.
손에 잡히는 무엇이 되지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문장文章을 찾겠다고 그 먼길을 걸으며,
어떻게 내가 그 많은 시절들을 돌고 돌아서 여기까지 왔는지 다 모르더라도 너, '나'는 알고 있으니까...
고생했다, 나여.
꿈을 꾸며 사느라 애쓴다, 너여.
그래, 그래,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