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프가니스탄은 아비규환입니다.
아마 사진을 보셨을 겁니다.
미군 수송기에 빼곡하게 자리 잡고 앉아있는 수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비행기에 올라탄 것만으로도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기뻤을, 하지만 끝내 비행기에 타지 못하고 울부짖던 사람들의 모습을 결코 떨쳐내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살 자리를 찾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비행기를 쫓아 달렸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비행기에 매달리다 공중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가뭄에 지친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는 삶.
쿠바 아래에 있는 아이티는 그렇지 않아도 가장 가난한 나라입니다.
황토를 구워서 아이들에게 먹일 정도로 가난한 그 나라의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코로나로 들썩거리는데 아시다시피 백신 접종률마저 나라마다 차이가 커서 지구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정말이지, 세상은 가난과 부가 함께 섞여 광란의 소나타를 연주해 내는 인상입니다.
한쪽에서는 파티가 끊이지 않고 다른 쪽에서는 진도 7.2의 지진이 일어나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건물 잔해 앞에서 억장이 무너져 내린 어떤 아주머니의 사진을 보며 그녀의 나이는 몇일까 떠올렸습니다.
나보다 많아도 걱정이고 나보다 적어도 슬픈 일이었습니다.
여기라고 꼭 좋을 일만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병실에서는 고통만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보다 더 좋은 상태에 있는 환자의 감출 수 없는 웅숭깊은 그 눈빛도 때로는 견뎌야 할 목록에 들어갑니다.
사람의 일은 늘 그렇습니다.
더 낫든지 덜하든지.
그 기준으로 가장 가까운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면 역시 삶과 죽음이란 명제 앞에 다다르고 맙니다.
내 죽음을 두고 나는 다른 사람들의 삶과 은연중에 키재기를 하는 것입니다.
가치를 따지는 것은 타고난 본능 같은 것인지, 살면서 몸에 밴 습성 같은 것인지요.
´삶´을 가지고 다니면서 높이나 길이를 재면 차이가 확연합니다.
그 차이는 사람을 분발시키기도 하지만 분열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메멘토 모리 그러는 것인가 봅니다.
´죽음´을 재는 손은 차이로 묻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차이가 아예 없습니다. 죽음은 오로지 한 사람, 내 몫으로 나를 향할 뿐이니까요.
나는 혼자 죽습니다. 그게 늘 진리처럼 찾아옵니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누구에게 얼마의 삯을 주든지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닙니다.
나는 어디에서 시간을 보냈고 언제 어디에서부터 일을 했으며 내 일은 언제 마쳤는가. 그리고 내가 받을 삯은 무엇인가.
´얼마냐´ 묻는 일보다 ´무엇이냐´ 고 묻는 것이 바른말이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칩니다.
비행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세상을 살아갈까요.
지진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분명히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마태오 20:15-16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훌륭한 사람 되라고 가르칩니다. 훌륭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느님도 우리에게 바랄 것입니다. 공부 잘해서 좋은 사람이 되길 바라실 것입니다. 그게 이치니까요.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