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묵상을 처음에는 한 사람에게 썼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도 흐릿합니다. 청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서른네 살, 젊은 아빠가 하도 안타까워서 몇 글자 적어 보냈던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마음이 움직였던 것은 그의 아들들, 그야말로 아직 여물지 않은 감자알 같은 아이들이 하나, 둘, 셋, 넷, 줄줄이 병실 문을 열고 뛰어들어온 날이었습니다.
어떡하냐, 삶이 이래서 어떡하냐.
내색도 하지 못하고 내 처지 위에 그의 처지가 큼지막하게 올려지던 답답함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그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그가 떠났습니다.
위로가 됐다는 말에 그 뒤로 계속 썼습니다. 기도라는 말도 그 후에 한참 지나서 생각난 말이었습니다.
마치 천막 하나 쳐놓고 거기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처럼 두서없고 대상도 없이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러면서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듯 시간이 갔습니다.
어제는 친구가 전화가 와서 묻더니 제 친동생도 집사람에게 소식을 묻더랍니다.
"요즘 왜 글이 안 올라오냐고."
사실 얼마 전에 많은 사람들을 졸업시켰습니다.
대학교도 4년이면 졸업인데 너무 오래 학교에 다니는 것도 재미없을 것 같았습니다.
졸업이라고 하면 좀 거창한데 그 정도는 아니고, 시범을 보였다는 생각입니다.
너도 매일 해봐라, 그게 뭐든지 매일 하다 보면 뭔가가 달라진다.
이왕이면 그것이 읽고 쓰는 일이면 좋고 거기다가 기도가 된다면 더없이 좋지 않겠냐.
그리고 나는 지나가고 싶습니다.
오늘 이렇게 또 저를 봐주시는 분들 덕분에 내일 아침에도 카톡 메시지를 날리면서 하루를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떤 분들은 4년이 다 지나도록 졸업을 유예시킨 분들이 계십니다.
모르겠습니다. 그건 어떤 인연에서 그런 것인지 거기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애틋한 것이 있었습니다.
서로가 비슷한 심정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공감일 겁니다.
내가 따로 남긴 분들은 더 애틋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애틋한 대목 중에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어제저녁에 생각지도 못하고 받은 메시지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응급실이지만 연락할 수 있는 몸을 허락해 주신 신께 감사한다. ´
새벽부터 일어나 남편 대신 택배 일을 하고 계실 사모님도 계시고, 자폐를 앓고 있는 아들이 너무 커버려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어머니도 계시고,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 아빠도 아직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어떤 날 새벽에는 이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깊은 회의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돕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서로 기대고 있습니다.
늘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덕분에 저도 잘 지내고 있다는 인사가 많이 늦었습니다.
모두 졸업하고 혼자 고요히 남을 시간을 상상해 봅니다.
아마 그때에도 또 누군가 신입생이 문을 열고 들어올 것입니다.
어떻게 인사를 하면 좋을까요.
반갑다는 말은 상황에 맞지 않고 어서 오세요는 더욱 이상할 테니,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습니다.
나도 예전에 아파봤다는 말 같지 않은 말은 절대로 하지 않고 음악을 먼저 틀어놓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도 나중으로 미루고 단풍이 좋다느니 하늘이나 날씨, 길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로 당분간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마태오 19:30
어떤 첫째가 되고 싶은지 물어도 보면서 내가 어떤 꼴찌였는지 다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도 꽤나 근사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꼴찌로 걷고 싶은 이유도 곁들일 것입니다.
그때는 계절이 얼마나 아스라이 느껴질지 문득 지금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옆에 앉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