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싹 먹어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입 밖에 내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말이 몇 개 있다.
별말도 아닌데 예민을 떠는 것 같기도 해서 혼자서만 지키는 말들, 그중에 하나.
´싹싹 먹어´
두 단어를 떼어서 보면 예쁜 느낌까지 든다.
´싹싹´ - 깨끗이, 남김없이, 보기 좋게라는 말은 듣기에도 좋다.
세상 이치가 서로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처서 處暑가 지났다는 것도 아침 바람이 일러준다. 매미 울음소리가 약해진 것도, 볕이 덜 내리쬐는 것도 그 언저리에서 공명 共鳴하는 것이다. 안에서 울리고 밖으로 퍼진다. 동시에 밖에서 울렸던 것들이 안으로 모여들기도 한다. 진폭 振幅이 확장되고 감동은 물결처럼 거기에 생겨난다.
나를 매개 媒介로 하는 것들의 소용 所用, 쓸모를 변화의 측면에서 관찰하는 일상.
그리고 나의 한계를 인식하며 한탄이라도 좋을 깊은 숨을 연거푸 세어보는 날들. 다만 그것이 드러나지 않기를, 길을 걸을 때처럼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일이 간혹 있다는 것이 여유라면 여유다.
나는 ´싹싹 먹어´ 그러는 말이 싫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말이 싫은 것이 아니라, 그 말이 불러오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생각이 말을 드러낸다고 하고 말은 생각의 모습이라고들 하는데 ´싹싹 먹어´ 그러는 순간, 나는 불편해진다.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 같은 것들을 사람들은 갖고 살아가니까.
내가 싫어하는 말이 내 입에서 나갈 때, 나는 추락한다. 여지없이 밑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붙잡는다. 아이들이 터무니없이 밥을 남겨놓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말을 붙잡는다.
그러기만 할 뿐, 다른 말을 찾아보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싹싹 먹어´라는 말 말고 ´다 먹어´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오로지 채식주의자를 위한 식단을 차려내는 것처럼 말한다. 말하려고 노력한다. 그 순간에는.
´일부러 다 안 먹어도 돼´
고백하자면 그 말 배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늘 ´먹기 싫으면 먹지 마´에 빠지고 마는 경험을 했다. 그렇게 말하면 모두가 서운해지고 만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밥을 챙겨준 부모도 밥을 먹던 아이들도.
그리고 항상 변명했다. 나는 그렇게 안 커봐서 다른 것은 몰라.
물론 밥은 깨끗하게 먹는 것이 맞다.
정성스럽게 먹어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점령한다.
물질이 풍부해질수록 정성스럽게 먹는 일은 드물어지고 희귀한 일이 될 것은 뻔하다.
밥 먹는 식탁 하나에서도 자본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권력이 된다. 물질만능에 빠지면 감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편리만 오롯이 남아 중요해지고 막강해진다.
그래서 더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러고, ´잘 먹었습니다.´ 그래야 한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다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밥 먹는 일로 감정이 상하면 밥 안 먹는 것만도 못하니까.
´싹싹 먹어´라는 말에는 감사한 마음을 가르칠 여유가 없다.
밥 먹을 때, 나는 ´부모´된 나와 내 부모를 실감한다.
그 짧은 시간과 작은 공간에서 나와 아이들,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도 그리고 홀로 누워 계시는 내 어머니도 함께 공존한다.
서로의 스타일이 부딪힌다. 말은 사라지지 않고 오래 남아 영향을 미친다. 그 사이에서 공존공생을 탐구한다.
가능한 부드럽게 밥을 먹는 일, 그 밥을 먹으면서 더욱 사람다워지는 일을 배운다.
자폐성 장애 1급인 20대 남성이 장애인 시설에서 김밥과 떡볶이에 기도가 막혀 숨졌다.
발버둥 치며 도망가던 사람을 힘으로 제압하고 김밥을 억지로 입안에 쑤셔 넣는 모습이 사람을 슬프게 한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김밥을 기겁할 정도로 싫어하니, 절대 먹이지 말라고 당부했었다고도 한다.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절규를 옮긴다.
: 저산소증으로 태어나서 장애를 갖고 살았는데 어떻게 저산소증으로 죽습니까. 부모가 이걸 지켜주지 못하고, 우리는 다 죄인이에요.